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어쩌다 보니 옷방은 늘 고양이들 차지였는데, 녀석들을 보내고도 한동안 치우지 못했다. 박박 긁은 벽지, 토해놓은 털뭉치, 갈기갈기 뜯은 쥐 장난감 같은 걸 보면 털썩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마음을 먹었다. 오랜 칩거와 지루한 장마로 숨이 콱 막혀버린 날이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새 바람이 불면 입고 나갈 옷을 찾기로 했다. 지금은 옷 가게도 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집엔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자연스럽게 빈티지가 된 옷들로 가득한 방이 있다.
“맞아, 이런 옷도 있었네.” 숨어 있는 보물들을 제법 찾았고, 빨래함에 넣기 전에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곤 내 못된 습관을 깨달았다. 친구 중에는 옷 모양이 망가진다고 주머니를 기워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반대다. 가방 여는 게 귀찮다며, 잔돈이든 영수증이든 주머니에 쑤셔 넣곤 한다. 10년 이상 안 입은 옷들까지 뒤지다 보니 별의별 게 다 나왔다. 동전 몇개, 지폐 몇장은 고맙다. 하지만 한짝만 남은 장갑, 이름 모를 새의 깃털, 녹슨 액을 토하고 있는 건전지라니. 물론 나만 이런 건 아닐 거다. 이상한 단어가 많은 독일어에는 ‘오랜만에 꺼내 입은 옷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단어가 있을 것도 같다.
주머니에서 뭔가 뱉어내는 옷들을 보면, 대체로 자주 안 입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계속 입는 옷은 빨래할 때 주머니를 뒤질 테니까. 3년에 한번쯤 입는 정장 재킷에선 버스표가 나왔다. 뺑뺑이 산길을 돌아 시골 학교를 갔을 때 마지막으로 입었나 보다. 멜빵이 붙은 바지 속엔 뉴올리언스의 식당 명함이 있었다. 10년 전 댄스파티에 가고 나선 안 입었던 건가? 그러다 어느 셔츠에서 꼬깃꼬깃한 영수증을 꺼냈다. 물에 젖었다 말랐는지 지점토 인형처럼 딱딱했다. 겨우 끝을 펴서 가게 이름을 알아냈다. 언젠가 스쿠터를 타고 독립문 고가를 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속옷까지 홀딱 젖은 채 단골 카페에 갔더니, 주인이 뽀송뽀송한 타월을 내주고 메뉴에도 없는 뜨거운 수프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덜 마른 셔츠 주머니에 영수증을 넣고, 돌아오자마자 세탁기에 던졌나 보다.
버릴 옷은 버리고 남길 옷은 욕조물에 담갔다. 오래된 옷들을 발로 꾹꾹 밟으니, 그 옷과 함께했던 기억이 거품처럼 떠올랐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떤 옷을 입는다. 월요일의 회의실과 주말의 캠핑장, 우리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움직인다. 겉옷만이 아니다. 주변을 바라보는 눈이나 상대를 대하는 태도까지 달라진다. 그리고 마음에도 어쩌다 한번, 필요할 때만 꺼내 입는 옷이 있다. 갑자기 몸이 아플 때,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때,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비밀이 생겼을 때.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옷을 입고 그 시간을 버틴다.
지금 나는 반년 이상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조만간 갈아입을 수 있겠네, 이제 단추를 좀 풀어볼까,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더욱 꽁꽁 여며야 하는 때가 왔다. 이 옷은 아주 이상한 모양이다. 흥부네 아이들의 옷과 닮았달까? 각자 구멍으로 목을 내밀고 있지만 아래는 서로 붙어 있어, 누구도 제멋대로 갈 수 없다. 이런 옷을 입고 이인삼각, 아니 백인 백일각, 아니 수십억 수십억일각이라는 지구인 전체가 움직이는 게임을 해야 한다. 이 거대한 옷의 주머니에도 무언가 쌓여가고 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진단검사표, 배달음식 포장재, 거짓 뉴스와 악담들… 우리가 이 옷을 벗을 수 있는 그날이 오더라도, 주머니 속의 잡동사니들을 통째로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거기에 우리가 이 옷을 입어야 했던 이유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