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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X 씹은 표정’의 아베, 후퇴를 선언하다

등록 2020-08-26 04:59수정 2020-08-26 22:14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04
정의용 실장의 극적인 백악관 앞뜰 회견이 열리기 직전, 도쿄에서 또 하나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베 총리는 이날 ‘X 씹은 표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얼굴로 “북한이 비핵화를 전제로 대화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런 북한의 변화를 평가한다”고 말했다.
2018년 3월8일 오후(현지시각)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한 뒤 북한 김정은의 트럼프 방북 초청 등 면담 내용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2018년 3월8일 오후(현지시각)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한 뒤 북한 김정은의 트럼프 방북 초청 등 면담 내용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굿 이브닝. 오늘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최근 저의 북한 평양 방문 결과에 대해 브리핑하는 영예를 가졌습니다.”

2018년 3월8일 저녁 8시(현지시각). 한국식 억양이 짙게 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영어가 어두움이 내려앉은 백악관 앞뜰에 울려 퍼졌다. 정 실장은 이날 전세계를 묘한 ‘패닉’에 술렁이게 만든 엄청난 뉴스를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0여년에 걸친 북-미 간 증오와 불신을 뛰어넘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금년 5월까지 만난다”는 소식이었다. 정 실장의 오른쪽 옆에는 서훈 당시 국가정보원장(현 국가안보실장), 왼쪽 옆에는 백발의 조윤제 당시 주미대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지켰다. 임종석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창작과 비평> 여름호 인터뷰에서 묘사한 대로 한국 외교사에 길이 남을 그야말로 “진기한 광경”이었다.

(당시 현장엔 없었지만) 이 극적인 회견이 결정되는 상황을 전하는 임 실장의 설명에 따르면, 트럼프는 당일 늦은 오후 정 실장을 갑자기 백악관으로 불러냈다.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사전 만남을 가진 뒤 트럼프 대통령을 예방하려던 한국 대표단은 크게 당황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선 미 대통령의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엔 미국 쪽 주요 책임자가 20명 남짓 앉아 있었고, 안쪽에 자리를 잡지 못한 비슷한 수의 인원이 복도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 실장은 불과 사흘 전인 5일 평양에서 무려 4시간12분에 걸쳐 면담한 김정은 위원장이 “뚜렷한 비핵화 의지를 갖고 트럼프 대통령과 만남을 희망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저명한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의 2018년 저서 <공포>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11월10일 백악관에서 당선자 신분이 된 지 갓 이틀 된 트럼프와 만났다. 둘의 만남은 20분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실제 회담 시간은 90분 넘게 이어졌다. 오바마는 재임 8년 동안 ‘전략적 인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북핵과 미사일 문제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 그사이 북한은 2016년 9월 5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미 본토 타격을 위한 탄도미사일 능력을 확보하고자 시험발사를 거듭했다. 뒤늦게 치명적인 정책 실패를 깨달은 오바마는 2016년 9월 국가안보회의에서 북핵과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해 미군이 북한에 선제타격을 가하는 게 가능한지 물었다. 미국 정보당국과 국방부가 한달 뒤 내린 결론은 “한 차례 공격으로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 예상되는 것은 북한의 보복 공격에 의한 ‘끔찍한 파국’이었다. 오바마는 그로부터 두달 뒤 백악관을 찾은 트럼프에게 “한반도 문제는 당신이 시작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일 겁니다. 그 문제가 나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2018년 초 힘겹게 남북대화가 시작됐지만, 이를 바라보는 백악관의 견해는 극히 부정적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트럼프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업적’이라 평가받는 이란 핵협정에는 극히 부정적이었던 트럼프(결국 미국은 이 합의에서 일방 이탈한다)는 북한과의 대화엔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이 판단에 오바마를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싶은 욕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 실장의 언급에 트럼프가 즉각 반응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맞지? 그래 맞아, 그거야. 나는 만날 의사가 있다. 그러니 당신이 가서 기자회견을 하라.”

당황한 정 실장이 맥매스터 보좌관과 함께 회견을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노, 노. 당신 혼자 하라.”

“맥매스터와 의논해서 하겠다.”

“노. 그냥 당신이 하라니까.”

이날 풍경과 관련해, 마키노 요시히로 <아사히신문> 전 서울특파원의 지난해 저서 <김정은과 트럼프>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4월에 (미) 서해안”에서 당장 만나겠다고 서두르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정 실장은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 뒤가 어떻겠냐”고 설득했다. 신이 난 트럼프는 2018년 1월 취임 후 처음 백악관 기자실에 들러 “조금 뒤 한국 안보실장이 중요한 발표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미 <시엔엔>(CNN)의 제프 젤러니 기자가 기묘하게 웃는 트럼프의 얼굴을 자신의 아이폰으로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정 실장의 극적인 회견이 열리기 직전인 9일(현지시각) 도쿄에서 또 하나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도쿄 총리관저에서 진행된 2분44초 동안의 약식 회견에서 아베 신조 총리는 ‘똥 씹은 표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얼굴로 “방금 트럼프 대통령과 일-미 (전화) 정상회담을 했다. 북한이 비핵화를 전제로 대화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런 북한의 변화를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해 1월 시작된 남북 접근을 바라보는 일본의 입장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불과 사흘 전인 6일 정의용 실장을 대표로 한 한국 특사단이 △4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비핵화를 위한 북-미 대화를 위한 북한의 의지 확인 △대화 기간 중 핵·미사일 실험 동결 등의 성과를 발표한 뒤에도 이런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튿날인 7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북한 문제에 대응할 땐 북한과 했던 과거의 대화가 비핵화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교훈을 충분히 고려하며 대응해야 한다”며 버텼다. 스가 장관은 이날 무려 세 차례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6일 성명(“북한이 비핵화를 위해 신뢰할 수 있고, 검증 가능하며, 분명한 조처를 취할 때까지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을 언급하며 북한에 대한 미·일의 입장은 완벽히 일치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9일 오전 김 위원장과 만나겠다는 트럼프의 통보를 받은 뒤 “북한의 ‘미소 외교’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는 입장이 “북한의 변화를 평가한다”는 쪽으로 수정된 것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해 동아시아의 냉전 구조를 깨뜨리겠다는 한국의 ‘현상 변경’ 전략과 대북 압박과 대중 견제를 통해 미·일 중심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일본의 ‘현상 유지’ 전략 사이의 첫 대결이 한국의 극적인 승리로 끝난 것이다. 씁쓸한 표정의 아베 총리와 대조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정 실장의 회견 직후 “(4월27일 개최되는)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두 분이 만난다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설 것이다. 5월의 회동은 훗날 한반도의 평화를 일궈낸 역사적인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둘러싼 한-일 간의 진검승부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트럼프의 강력한 희망에 의해 시작된 북-미 대화 자체를 막진 못했지만, 향후 대화 흐름이 일본한테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모든 외교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면 될 터였다. 대한반도 외교를 전담하는 가나스기 겐지 당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잡지 <외교>의 2018년 5월치 대담에서 일본의 향후 대응을 예상케 하는 심오한 발언을 남겼다.

“지금 순간적으로 낙관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만, 이후 전개를 냉정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중략) 문 정권은 북한과 화해를 하나의 목표로 내걸고 성립한 정권이니까, 북한과 심리적 거리는 일·미와 다른 면이 있다. 그 점에 유의해 일-미-한의 협력을 느슨하게 하는 일 없이 추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대화의 목적은 북한 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후, 한국이 한-미-일의 협력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일본의 처절한 대미 접근이 이어진다. 고노 다로 당시 외무상은 3월16일 맥매스터 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을 만나 “북한의 핵·미사일을 포기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말했고, 아베 총리는 4월17~18일 이틀 동안 무려 세 차례나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며 한국의 일탈을 견제했다. 이 회담 결과를 전하는 일본 외무성의 자료를 보면, “양 정상이 북한이 시브이아이디 방식을 통해 모든 대량파괴무기와 모든 탄도미사일 계획을 포기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핵뿐 아니라 북한이 중·단거리 탄도미사일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최대치 요구’였다.

그에 앞서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이 한반도를 강타한다. 북핵 문제를 담당하게 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3월22일 전격 교체된 것이다. 미 육군 장성 출신의 맥매스터의 후임으로 정해진 이는 기묘한 콧수염을 기른 ‘악명 높은’ 원조 네오콘이었다. 북한의 정권교체를 공공연히 주장해온 대북 초강경파 존 볼턴이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5회에선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NSS) 국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의 본격적 대미 접근에 대해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들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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