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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트로트, 블랙핑크 그리고 편견 / 이재성

등록 2020-08-24 17:11수정 2020-08-25 09:26

이재성

문화부장

“음악이야말로 세대와 세대 사이를 가르는 가장 날카로운 흉기”라는 구절을 장정일의 소설 <구월의 이틀>에서 발견했을 때, 내가 쓴 문장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감수성이 예민했던 10대와 20대에 즐겨 듣던 음악에서 플레이리스트의 진화는 멈추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 약 10여년 동안 지하철 경로석이나 고요한 산에서 울려퍼지는 트로트를 들을 때마다 저 아포리즘 같은 문장의 정확성을 재확인하곤 했다. 무례함을 넘어서 특정 세대의 오만함과 이기심의 상징처럼 여겨져 반감이 커졌다. 이분들의 안하무인격 태도가, 나이 들어 흔히들 터득하게 되는 뻔뻔함에서 오는 것인지, 식민지와 전쟁과 군사쿠데타라는 악다구니의 시대를 통과한 세대 특유의 생존 기술 같은 것인지 늘 궁금했다. 그리고 이분들을 타산지석으로 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 세대의 음악을 멀리하게 됐던 것 같다. 갈수록 저속해지는 노골적인 가사만으로도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트로트를 싫어하는 행위가 부모 세대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버지 영화”와 싸우며 ‘누벨바그’ 이론을 정립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68세대처럼, 한국의 86세대 역시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 부모 세대에 대항해 싸웠다. 트로트가 ‘일본 엔카의 후예’라는 주장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트로트가 부활했다. 이제 ‘엔카’ 같은 얘긴 꺼내기도 무색하다. 주변의 역학관계도 복잡해졌다. 채널마다 난립하는 트로트 프로그램 탓에 티브이를 켜기 싫어졌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임영웅의 ‘사생팬’이 된 친구도 있다. 이젠 어린이들마저 트로트를 좋아한다니, 엄살을 좀 섞어 말하면, 트로트에 관한 한 ‘적전분열’에 이어 ‘격세유전’의 샌드위치 세대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트로트가 저비용으로 시청률 올리기 좋은 아이템이어서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물량 공세를 한 결과라고 비판할 수도 있고, 반짝 유행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고 매력적인 실력파 가수들로 트로트가 진화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대중이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서 내가 트로트에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는 반감을 버리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편견은 의지로 버릴 수 있지만, 취향은 노력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요에 대한 편견이 하나 더 있었다. 꽤 오랫동안 나는 아이돌 음악이 음악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케이(K)팝은 공장에서 만들어낸 공산품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뮤지션 자신의 삶과 철학을 직접 곡으로 만들어 연주한 것만이 진정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장정일의 ‘날카로운 흉기’를 피하는 방편으로, 나름 열심히 ‘젊은 음악’을 업데이트하면서도 주로 인디음악에 국한했던 이유다.

윗세대 음악에 대한 편견과 달리 아랫세대로의 편견은 수월하게 깨졌다. 지난 6월 하순 블랙핑크가 발표한 ‘하우 유 라이크 댓’의 뮤직비디오가 한달 남짓 만에 4억뷰를 돌파했을 때였다. 대체 무슨 노래길래, 하고 들어봤다가 그대로 빠져들고 말았다. 독창적인 멜로디와 타악기의 향연, 박력 있는 보컬이 어울려 ‘블랙핑크’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있었다. 노래 ‘포에버 영’에 낮게 깔리는 ‘블랙핑크 이즈 레볼루션’이라는 선언이 헛말이 아니었다. 퍼포먼스는 물론이고 음악 수준과 멤버들의 가창력 또한 주류 팝의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결국 장정일의 문장은, 대개의 아포리즘이 그러하듯 절반만 옳은 주장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특히 요즘처럼 레트로가 주기적으로 유행하고 과거로 손쉽게 월담할 수 있는 시대의 음악은 세대를 능히 뛰어넘는다. 냉정히 돌아보면, 86세대가 스스로 만들어 불렀던 민중가요 중에도 이른바 ‘뽕삘’ 가득한 노래가 많았다. 머리로는 트로트를 거부하면서도 핏속에 흐르는 정서는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편견이 떠난 자리에 포만감이 찾아왔다. 남는 장사 아닌가.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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