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대공원 01. 박정희 대통령 친필 기념비. 배정한
배정한 ㅣ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누구나 지도 바깥의 장소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지도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지도에 기록된 정보보다 훨씬 두꺼운 이야기 자국들이 제멋대로 쌓인 곳. 나에겐 그런 장소 중 하나가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이다. 가끔 이 공원에 들른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꺼내면 대개는 놀라서 되묻는다. 아직 대공원이 있단 말이야? 20~30대 중에선 공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때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던 스펙터클의 공간, 어린이들의 첫번째 천국이었던 원조 놀이공원에는 이제 세월이라고 불러도 좋을 긴 시간의 흔적들이 얼룩으로 남아 있다. 긴 장마가 시작되기 전 주말 오후, 지도 밖의 쇠락한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의 능 터였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는 1927년 서울컨트리구락부 골프장이 들어섰다. 골프장을 교외로 옮기고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속전속결 180일 공사로 이어졌다. 1973년 5월5일, 드넓은 녹색 초원과 환상의 놀이동산을 갖춘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열었다. 뜨거운 햇살과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잔뜩 겁을 먹었던 어린이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개장일 오후 세시에 입장객 60만명을 넘었다. 미아보호소는 300명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터져나갔다. 그해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30만명. 당시 서울 인구는 630만명이었다. 남산공원이나 삼청공원 같은 산자락이 공원의 전부였던 서울에 대형 도시공원의 시대가 열렸다.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 대통령 친필을 새긴 기념비는 낡고 닳은 모습으로 아직 그 자리에 있다. 70년대에 유년을 보낸 세대는 거의 다 이 기념비나 정문 안쪽 분수대, 팔각당 앞 꽃시계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을 가지고 있다. 비용을 줄이느라 돌을 쓰지 않고 콘크리트 위에 석고를 바른 분수대와 새하얀 모자상들은 세종로 충무공 동상의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1996년 서울을 처음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 이 조악한 분수대에 반해 똑같은 작품을 자기 집 정원에 설치하려 작가를 수소문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분수대는 최신식 음악분수로 바뀌었고 모자상은 주변 녹지대로 자리를 옮겼으며 꽃시계는 사라졌다.
쉰 살을 눈앞에 둔 중년의 어린이대공원은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다. 긴 세월 동안 고치고 덧댄 시설과 공간의 콜라주, 과거의 화려함을 찾기 힘든 쓸쓸한 풍경이다. 여러 시간대가 탈색된 채 겹쳐져 있어 어수선하지만 그 산만한 틈을 일상의 호젓한 산책과 한가로운 휴식이 채운다. 자연스레 나이를 먹은 지형과 수목, 산책길에 새로 만든 ‘맘껏놀이터’가 병치되어 있다. 1970년에 지은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철거 직전 살아남아 시간의 흔적을 견뎌내며 ‘꿈마루’로 부활해 유년의 기억을 연결해준다.
숨 가쁘게 후문 방향 언덕길을 넘으면 한때 국내 최초,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았던 놀이동산. 모든 아이들의 소원은 여기서 환상의 ‘청룡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다섯 칸 열차 한 칸마다 네 명씩 타는 청룡열차는 500m 궤도를 최고 시속 60㎞로 달렸다. 덜컹덜컹 소리 내며 힘겹게 레일을 오른 뒤 내리막으로 떨어지는 순간, “꺄악” 비명이 허공을 메웠다. 초기 놀이기구들은 2013년에 철거됐고 269톤의 고철로 변해 포스코 제철소의 용광로로 들어갔다. 새로 단장한 놀이동산은 에버랜드나 롯데월드와 경쟁하지 못하고 퇴락의 길을 걸었다. 방치일까 전시일까. 놀이동산 한구석엔 퇴역한 1세대 청룡열차 한 량이 부식된 채 놓여 있다. 후문을 벗어나자 다시 지도 안의 도시가 펼쳐졌다.
어린이대공원 02. 마이클 잭슨이 사랑한 분수대의 모자상. 배정한
어린이대공원 03. 50년 세월을 견디고 부활한 꿈마루. 배정한
어린이대공원 04. 퇴역한 1세대 청룡열차. 배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