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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평창의 충돌…일본 깊은 의구심을 품다

등록 2020-08-11 17:33수정 2020-08-26 12:55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03
2018년 2월9일 저녁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용평 블리스힐스테이에서 포토 세션이 열리고 있다. 아베 총리가 한·미 정상과 한발짝 떨어져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2월9일 저녁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용평 블리스힐스테이에서 포토 세션이 열리고 있다. 아베 총리가 한·미 정상과 한발짝 떨어져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상 간에 이뤄진 감정 섞인 공방이 공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날 한·일 정상은 ‘외교적 수사’를 통해 감춰왔던 서로의 ‘진짜 속내’를 확인했는지 모른다. 한-일 갈등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 2주년을 맞은 2017년 12월28일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며 일본에 큰 충격과 실망을 안긴 지 불과 나흘 만에 아베 신조 총리는 한반도에서 날아온 또 하나의 급보를 접하게 된다. 지난해 20발 넘는 탄도미사일을 쏘아대고 6차 핵실험까지 감행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신년사에서 돌연 ‘북남관계 개선’과 2월 ‘평창겨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해 남쪽에 “대표단 파견을 포함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국면전환에 일본은 ‘말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아베 총리에게 2017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한해였다. 그해 초 터진 모리토모·가케 학원 비리 의혹으로 일본에선 아베 장기 정권의 폐해를 상징하는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긴다는 뜻)라는 말이 대유행어가 됐다. 20% 후반까지 지지율이 급락했던 아베 총리를 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북한이었다. 김 위원장이 일본 열도를 위협하는 탄도미사일을 쏘아대자 형용하기 힘든 안보 위협을 느낀 일본인들이 다시 정권을 중심으로 뭉친 것이다.

그와 함께 지지부진하던 대외 정책에도 힘이 붙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선언하자, 아베 총리는 이틀 뒤인 21일 한·미·일 3개국 정상회담에서 “‘모든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귀국한 아베 총리는 25일 ‘국난을 돌파하기 위한 해산’을 단행해, 10월22일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또 한번 ‘손쉬운 승리’를 손에 넣었다. 선거 승리 직후엔 ‘필생의 과업’이라 말해온 개헌을 재차 언급하며 “폭넓은 합의를 형성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1월5일엔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서 “일·미가 100% 함께 있다는 것을 강하게 확인했다”고 선언했다. 새로 시작된 2018년은 개헌을 위해 총력을 집중하는 한해가 되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북한의 국면전환으로 상황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한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신년사가 나온 다음날인 2018년 1월2일 오전 10시 “통일부와 문체부는 후속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불과 네시간 만인 오후 2시 조명균 당시 통일부 장관이 북을 향해 “9일 판문점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북한도 빠르게 화답했다.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3일 오후 3시30분 <조선중앙텔레비전>에서 그동안 끊겼던 남북 대화채널을 복원하겠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반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2일 트위터에서 “로켓맨(김 위원장을 지칭)이 지금 처음으로 한국과 대화를 원하고 있다”며 남북 접근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문 대통령은 4일 밤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회담에서 올림픽 기간 중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12월 제안에 대한 합의를 끌어냈다.

남북의 속도전에 일본은 크게 당황했다. 한때 일본 ‘리버럴의 성채’ 구실을 하던 <아사히신문>마저 3일 해설 기사에서 김 위원장이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 대화를 언급한 배경엔 미-한 관계를 흔들어 (둘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국이 북한에 접근하면 미-한 동맹의 약체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반응은 5일에야 나왔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훈련 기간에 대한 결정(훈련을 연기한 것)은 북한에 대한 압력 강화의 움직임에 손상을 주는 게 아니다. 일·미·한이 압력을 최대한 높여간다는 방침엔 변화가 없다”며 의미를 축소하려 애썼다. 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은 5일 “과거 북한이 대화 자세를 보일 경우 국제사회가 지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계속 속기만 했다”며 북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아사히신문>은 6일 “한국이 군사연습의 일시 정지를 요청해도 미국이 거절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100% 함께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 미-일 간에 남북 접근에 대한 묘한 견해차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어찌 대응해야 할까. 여론은 둘로 갈라졌다. 일본의 극우는 정부 간 소중한 약속(12·28 합의)을 뒤집는 한국에 본때를 보이기 위해 아베 총리가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점차 힘을 얻게 되는 한-일 ‘단절론’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 등 정권 핵심부는 이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내린다. 이른바 ‘관여론’이다. 개막식 참가를 결심한 아베 총리는 자신과 사상을 함께하는 <산케이신문> 인터뷰에 나선다.

1월24일치 지면에 실린 아베 총리의 인터뷰는 남북 접근에 대한 일본 우익의 견해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아베 총리는 “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이며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다. 제반 사정이 허락한다면 개막식에 출석하려 한다”고 운을 뗀 뒤, 개막식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를 두가지로 정리했다. 아베 총리는 첫째 12·28 합의에 대해 “한국이 일방적인 조처를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생각에 대해 대통령에게 직접 전하겠다”, 둘째 한국의 대북 접근에 대해선 “북한에 대한 압력을 최대화한다는 방침은 조금도 굽혀선 안 된다. 이 생각도 문 대통령에게 명확히 전하려 한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나아가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6자 회담에 의한 합의(9·19 공동선언 등)에 따라 북한은 핵 폐기를 약속했지만, 그들은 이를 시간 벌기로만 사용했다. 일·미·한이 긴밀히 연대해 고도의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남북 접근 방침을 철회시키기 위해 적극 관여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아베 총리 역시 한국이 쉽게 설득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미·일의 공동 압박이었다.

2월7일 오후 5시30분, 성조기와 일장기가 두개씩 놓인 일본 도쿄 총리 관저 1층 기자회견장으로 아베 총리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들어섰다. 이전보다 한결 편해 보이는 아베 총리의 표정과 근엄하게 찡그린 펜스 부통령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뤄 회견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회담은 펜스 부통령의 8일 방한을 앞두고 급속히 진행 중인 남북 대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공식 석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베 총리는 “펜스 부통령과 충분한 시간을 들여 북한의 최신 정세를 분석하고, 이후 방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관련국에 북한의 ‘미소 외교’에 눈을 빼앗기지 않도록 호소하자는 데 일치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언급한 ‘관련국’은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펜스 부통령이 뒤이어 발언했다. 그는 “동맹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한이 독재적이고 잔혹한 국가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 북한이 이번 올림픽을 프로파간다(선전)로 이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북한을 최대한 압박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실현하기 위해 압력을 계속 가하겠다. 북한에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엄혹한 제재를 조만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펜스 부통령은 9일 문 대통령이 주최하는 사전 리셉션에서 5분 만에 자리를 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접촉을 피했다.

예상대로 9일 강원도 용평리조트 블리스힐스테이에서 이뤄진 한-일 정상회담은 엉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자리에 배석했던 한 인사는 “아베 총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위안부 얘기를 꺼냈다. 회담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았다”고 말했다. 감정이 상한 청와대는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을 통해 아베 총리가 “한-미 군사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이 “이는 우리 주권의 문제이고 내정에 관한 문제”라고 반박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정상 간에 이뤄진 감정 섞인 공방이 공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날 한·일 정상은 ‘외교적 수사’를 통해 감춰왔던 서로의 ‘진짜 속내’를 확인했는지 모른다. 한-일 갈등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실망 속에 귀국한 아베 총리에게 또다른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 온다. 며칠 전 자신과 단단히 말을 맞췄던 펜스 부통령이 11일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북한이 대화를 원하면 우리도 대화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짜 생각은 뭘까. 일본은 깊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 4회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대화 수락과 이에 대한 일본의 응전을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들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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