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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간헐적 실종을 위한 연습 / 이명석

등록 2020-07-31 17:15수정 2020-08-01 02:35

이명석|문화비평가

“각자 이름부터 정해. 눈에 뜨이지 않는 평범한 걸로.”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정복에 명찰을 단 여성 네명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선배인 듯한 사람이 대화를 주도했는데, 아무래도 내용이 수상했다. 아마도 신분세탁을 해서 새 인생을 사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후배가 물었다. “언니는 뭘로 정했어요?” 선배는 유리잔의 얼음을 오도독 깨물었다. “그건 알려주면 안 되지. 우리끼리도.”

누구든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리라. 지금의 나를 옥죄는 이름, 직장, 가족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인생으로 ‘리셋’할 수는 없을까? 경찰청 통계를 뒤져보니 성인 가출자의 실종 신고 숫자가 연간 7만을 넘는다. 대부분은 범죄와 연관 없는 자발적 가출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자가실종’이라 부르는데, 1990년대 여성 장기 기사가 나리타공항에서 갑자기 사라진 사건을 계기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완전실종 매뉴얼> <실종 초 입문> <완전이력소거 매뉴얼> 같은 책들은 단계별로 자신의 흔적을 없애고 사라지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런 시도들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지, 나는 잘 모른다. 가출자들은 불안정한 거주에 건강을 해치고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 쉬우리라. 또한 그들이 말없이 떠난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산산이 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사라지고 싶은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완전한 실종은 아니더라도, 간헐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실종을 통해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는 상반된 두 종류의 해법이 있다.

하나, 로빈슨 크루소 해법. 멀고 한적한 곳으로 달아난다. 크루소는 잔소리꾼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브라질에서 농장을 일구려다 무인도에 표류했다. 자발적 실종을 꾀하다 아예 못 돌아가게 된 케이스다. 그런데 그가 살아가게 된 야생의 섬은, 도시의 소음에 지친 이들에게는 낭만적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적 해법으로는 무인도 캠핑, 오지 여행, 귀농 교실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중요한 조건이 있다. 우리가 원래의 삶을 완전히 잊고 다른 삶에 푹 빠질 정도로 충분한 기간이 주어져야 한다. 서구에서는 갭이어(Gap Year), 1년 정도의 시간을 주는 기업도 있다는데 그것이 벅차다면 갭먼스, 1개월 정도의 시간은 가능하지 않을까?

둘, 지킬 박사 해법. 가깝고 번잡한 곳에 숨는다. 지킬은 자신을 옭아맨 위선적인 삶에 넌더리를 내며, 하이드로 변신해 런던의 뒷골목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하이드는 말하자면 지킬의 ‘부캐’다. 유재석의 유산슬, 김신영의 둘째 이모 김다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런 부캐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역시 새로운 이름과 개성으로 변신해 본캐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엄한 교감 선생님이 주말이면 화려한 의상으로 살사 바를 누비고, 얌전한 고등학생이 방과후의 팬클럽에서 국제적인 ‘총공’을 진두지휘한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네 이웃의 부캐를 들추지 말라. 설령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우연히 지인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했더라도 조용히 무시해주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내가 신분세탁 4인조를 만난 건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사이 그들은 탈출에 성공했을까? 새로운 이름, 직업, 얼굴로 바꾼 뒤, 우연히 서로를 마주치고선 싱긋 웃으며 지나쳤을까? 아니면 오늘도 어두운 탕비실 구석에서 인스턴트커피를 홀짝거리는 야근 요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나는 응원한다. 우리는 가끔 집을 뛰쳐나가고 길을 잃어야 한다. 상상 속의 연습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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