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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집단 사망의 과학

등록 2020-07-30 17:09수정 2020-07-31 02:39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들은 왜 떨어지는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그들은 왜 숨을 쉬지 못하는가. 가장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이 문제를 우리는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집단 사망의 과학’은 빈번한 집단 사망 현상을 묻어버리지 않고 현존하는 최선의 과학을 동원하여 사망의 과정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전치형|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지난 월요일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규모 정밀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5천가구, 1만5472명을 대상으로 방문조사를 했더니 그중 16.6%에 해당하는 2844명이 가구 내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경험이 있었고, 살균제 관련 질병 진단을 받은 사람이 44명, 사망한 사람이 7명이었다. 이 데이터를 전체 인구에 맞춰 분석하면,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약 627만명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고, 그중 약 67만명이 건강피해를 보았고, 약 9만명이 병원에서 가습기 살균제 관련 질병 진단을 받았으며, 결국 약 1만4천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한다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다. 1만4천명이다.

이 발표의 핵심은 약 1만4천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특별조사위원회가 ‘추산’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질병을 얻어 사망한 사람을 일일이 다 세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것은 확실히 알아낼 수 없는 추산값으로만 남을 것이다. 2020년 7월17일 기준으로 집계된 사망자가 1553명이니 그 아홉 배에 이르는 사람들이 미처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를 보내지도 못한 채 사망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국가의 특별조사위원회가 과학의 힘과 행정의 힘을 모두 동원해도 다 세지 못한 이 집단 사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셀 수 있는 집단 사망은 공장이나 공사장 같은 산업 현장에서 발생한다. <경향신문>이 2018년 1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발생한 산업재해 사고를 조사하여 만든 아카이브는 1748명의 노동자가 ‘떨어짐’, ‘끼임’, ‘물체에 맞음’, ‘부딪힘’, ‘깔림·뒤집힘’ 등의 사고를 당해 사망했음을 한눈에 보여준다.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 추락’, ‘땅을 파고 들어가 작업 중 안전조치 없이 붕괴’, ‘제대로 적재·고정되지 않은 물체가 떨어지면서 깔림’ 등으로 사고 형태가 상세하게 분류되어 있지만, 결국 이것도 산업 현장의 집단 사망 사태다.

어떤 집단 사망은 티브이 뉴스로 나올 만큼 주목받기도 하지만, 어떤 집단 사망은 작은 소리만 내면서 나날이 쌓여간다. 어떤 집단의 사망은 누군가 나서서 퍼즐을 맞추지 않으면 그것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없이 사라진다. 지금 어디에 또 어떤 집단의 사망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과학은 가시적인 동시에 비가시적인 이 집단 사망 현상을 어떻게 발견하고,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을까. 과학은 집단 사망이라는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현상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원인으로 이렇게 많이 사망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과학을 ‘집단 사망의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경향신문>이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내세운 “그들은 왜 떨어지는가”라는 질문은 ‘집단 사망의 과학’이 답해야 할 연구 질문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높이 5m가 안 되는 곳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현상은 일차적으로 간단한 물리학 계산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원인을 밝혀내고 제거하는 것은 물리학 바깥으로 나가야만 가능하다. ‘집단 사망의 과학’은 개별 사망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데 필요한 과학만이 아니라 사망의 규모, 사망의 패턴, 사망의 사회적 결과를 함께 밝히는 과학, 이른바 ‘융합’ 과학이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들은 왜 떨어지는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그들은 왜 숨을 쉬지 못하는가. 가장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이 문제를 우리는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집단 사망의 위험은 어느 국가에나 있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집단 사망을 조사하고 막는 일에 과학적, 정치적 역량을 집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쓸데없고 소모적인 활동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집단 사망의 과학’은 빈번한 집단 사망 현상을 묻어버리지 않고 현존하는 최선의 과학을 동원하여 사망의 과정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이 과학의 결과는 논문만이 아니라 아카이브, 조사위원회 보고서, 전문가 의견서, 정책 권고안 등 가능한 모든 형태로 발표되어야 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집단 사망의 연쇄를 끊는 일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과학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통로 중 하나일 것이다. 집단 사망을 연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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