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전인 2017년 1월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가 손을 잡고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에 나온 책 <운명에서 희망으로>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우리로선 어쨌든 지속적으로 일본에 요구해야 할 내용”이라고 말했다.부산/연합뉴스
북핵 위협으로 인한 한-일의 ‘기묘한 밀월’은 2017년 12월로 접어들며 파탄에 이른다. 먼저, 일본이 우려하던 일본군 ‘위안부’ 티에프의 결론이 12월27일 공개됐다. 티에프는 보고서에서 12·28 합의에 대해 “피해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이며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균형한 합의”였다고 결론 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2015년 말 12·28 합의가 공개된 뒤, 일본 시민사회의 입장은 첨예하게 둘로 갈렸다. 일군의 학자와 운동가들이 한국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의 주장에 호응해 ‘백지 철회론’을 내세운 데 견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등은 일본 정부의 추가 조처를 통해 합의를 충실히 하자는 ‘보완론’으로 맞섰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사죄 편지’ 등 추가적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아베 신조 총리에겐 그럴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베 총리는 앞서 2015년 8월 패전 70주년을 맞아 내놓은 ‘아베 담화’에서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고 말했고, 2016년 10월 초 사죄 편지를 보내달라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쇼와의 요괴’라 불리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로 1954년 태어난 아베가 전후 최장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서 발생한 ‘두개의 비극’인 위안부와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강경한 태도 때문이었다. 이 두 문제는 아베 총리가 1993년 첫 정계 진출 이후 ‘우익의 희망’으로 주목받게 되는 정치적 원점이었다. 한국인이 볼 때 12·28 합의는 박근혜 외교의 무능을 상징하는 ‘굴욕 합의’였겠지만, 아베 총리에겐 반세기 넘게 일본을 괴롭혔던 한-일 과거사를 총결산하고, 한국을 한-미-일 3각 동맹의 틀 안에 포섭하기 위해 내린 ‘힘겨운 결단’이었다. 아베 총리는 12·28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부 예산으로 10억엔을 내놓았다(이는 무라야마·하토야마 정권도 하지 못한 일이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일본 우익 내부에선 심각한 진통이 이어졌다. 아베 총리는 이 대립을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 생각했고, 그랬기에 합의 직후인 2016년 1월 위안부 문제는 “내 손으로 꼭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아베 총리의 ‘깊은 정념’을 이해하긴 힘든 노릇이었다. 12·28 합의는 2016년 가을 시작된 촛불집회에 의해 사실상 부정됐다. 3년 뒤 정의연에 대한 매서운 공격에 나서게 되는 이용수 할머니는 연단에 올라 “새 대통령이 바뀌어 대한민국을 튼튼히 지켜주시도록 엎드려 빌겠다”고 말했다.
와다 명예교수는 2016년 말 <한겨레> 인터뷰에서 촛불집회에 대한 자신의 미묘한 감상을 토로했다.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고 많은 일본인들이 감명을 받았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새 대통령이 나오게 된다. 새 대통령이 12·28 합의를 없앤다고 하면 한국의 엄청난 국민적인 힘이 일본을 겨냥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새 대통령이 안정적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주변국과 관계를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1953년 ‘흥남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나 촛불의 염원을 등에 업고 정상의 자리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애끓는 정념이 있었다.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인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는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조약이나 협약에 해당되기 때문에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동의가 없었으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고 말했고, 대선 공약집에는 “재협상 등을 통해 피해자들이 인정하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도출”(234쪽)하겠다고 밝혔다.
시작부터 삐걱거릴 운명이던 두 정상이 처음 접촉한 것은 대선 다음날인 2017년 5월11일 전화회담을 통해서였다. 이 결과를 전하는 일본 외무성 문서에서 묘한 절박함을 느낄 수 있다.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에게 “한국은 일본에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이다. 일-한 관계는 오랜 시간 양국 관계자들이 부지런히 노력을 쌓아 구축해온 것이다. 문 대통령과 함께 미래 지향적인 일-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12·28 합의로 이제 그만 역사 문제를 봉합하고, 우호 관계를 만들어가자는 제안이었다.
그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응답은 윤영찬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의 브리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12·28 합의 이행을 요청하는 아베 총리에게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그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 국민들의 정서와 현실을 인정하면서 양측이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답했다. 아베 총리가 한국의 ‘합의 이행’을 강조한 데 견줘, 문 대통령은 한-일 ‘공동의 노력’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한국이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일본과 “양국 공동의 노력(즉 일본의 추가 조처)이 필요하다”는 한국 사이의 간극은 이후 3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1㎜도” 좁혀지지 못했다.
하지만 2017년 한-일 관계는 나름 ‘관리’되고 있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7년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발사 준비가 마감단계”에 이르렀다고 밝힌 뒤, 그해 늦가을까지 탄도미사일 발사를 거듭하고 핵실험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5월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2를 발사했고, 7월엔 최초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4형을 쏘아 올렸다. 그중에 8월과 9월 쏘아 올린 화성-12형 2발이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 상공을 날아 서태평양에 떨어졌다. 그때마다 일본 전역에 제이(J)-얼러트(전국즉시경보시스템)가 발동됐다. 놀란 일본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북한은 9월3일엔 6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11월29일엔 워싱턴 등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화성-15형 발사에 성공한다.
그때마다 한·일 정상은 전화회담을 통해 연대를 확인하고, 한-일, 한-미-일 3개국 정상회담을 열어 북한을 견제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2017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반년 남짓 동안 한-일 정상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을 통해 세번 직접 만났고, 아홉번 전화회담을 했다. 이런 소통의 기회 때마다 아베 총리는 “일-한의 현안(위안부 문제)을 적절히 관리해가는 게 중요하다”며 7월 말 외교부 산하에 만들어진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이하 티에프)를 견제했다. 그러나 9월3일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나흘 뒤인 7일 전화회담에선 “지난달 세번이나 전화회담을 하고, 북한의 핵실험 이후인 4일에도 전화회담을 하는 등 (양국) 정상끼리 의견 교환이 가능한 관계 구축이 가능해져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일’로 알려진 문 대통령이 일본이 느끼는 안보 위협에 공감하고, 대북 제재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자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다. 눈앞에 닥친 북핵과 미사일 위협이 12·28 합의를 둘러싼 양국 간 ‘이견’을 뒤덮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한-일의 시선엔 심연 같은 ‘견해차’가 잠복해 있었다. 통화 때마다 북한에 대한 군사·경제적 압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아베 총리에게 문 대통령은 “제재와 압박이 목표가 아니다”라고 거듭 이견을 표출했다. 문 대통령은 6월12일 총리의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한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에겐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를 위해 더 강한 압박과 제재가 필요하다는 아베 총리의 말씀에 공감한다”면서도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야 완전한 핵 폐기에 이를 수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함께 도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북핵 위협으로 인한 한-일의 ‘기묘한 밀월’은 12월로 접어들며 파탄에 이른다. 먼저, 일본이 우려하던 티에프의 결론이 12월27일 공개됐다. 티에프는 보고서에서 12·28 합의에 대해 “피해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이며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균형한 합의”였다고 결론 냈다. 문 대통령은 이튿날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양국 현안을 적절히 관리해가자”는 아베 총리의 거듭된 메시지가 문 대통령에 의해 간단히 무시됐다고 받아들였다.
사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충격이 있었다. 문 대통령은 19일 미국 <엔비시>(NBC) 방송 인터뷰에서 2018년 2월 평창겨울올림픽 기간 동안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하자고 미국에 제안했음을 밝혔다. 역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해선 한·일이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이웃이 아니었던가! 한국의 ‘전선 이탈’로 패닉에 빠진 일본에선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개막식 참가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강경 여론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3회에선 한-일이 서로에 대한 전략적 불신을 폭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 ‘평창의 비극’에 대해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들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등을 썼고,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