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ㅣ 정치팀장
신이 떠나버린 세계에서 ‘전향’은 불가피하다. 복수의 이념이 진리를 자처하며 경합하는데 무엇이 참인지를 분별해줄 최후의 보증자가 없다면,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신념을 바꾸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전향’이 우리말 체계에 들어온 것도 일제 강점 이후다. ‘급진주의자가 자기 신념·사상을 포기하고 체제가 공인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일컫던 일본 말 ‘덴코’(轉向)에서 유래했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에 ‘전향’이라 이를 만한 전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성장한 뒤에는 그것을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분명히 하고 분변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1797년 동부승지에 임명된 정약용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곡진한 소(疏)의 형식을 취하였으되, 실상은 ‘사상 전향서’였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왕의 친위세력인 시파를 견제하려고 무리의 신성 격인 정약용 가계의 천주교 이력을 집요하게 공격하자, 정약용으로선 자신의 정치생명은 물론 일가의 목숨까지 위협할지 모를 ‘사상 문제’를 차제에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전향 문제를 새삼 떠올린 건 지난 23일 있었던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때문이다. 북한 고위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이 이 후보자에게 “나는 여기 와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후보자는 언제 어디서 ‘주체사상을 버렸다’고 선언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나처럼 공개 전향을 안 했으니 여전히 주사파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투였다.
1980년대 학생운동 주류가 주체사상에 경도됐던 건 분명하다. 일부는 별다른 검증 없이 정치권에 안착했다. 권력의 게임 규칙을 일찍부터 터득한 그들은 시장의 문법에도 신속하게 적응하며 정치·경제·문화자본의 점유 지분을 빠르게 불렸다. 마침내 사회적 주류의 지위마저 공고히 한 그들에게, 젊은 시절 든든한 ‘민주의 기지’라 여겼던 북한은 ‘달래고 구슬려 시장에 편입시켜야 할 특수관계국’ ‘긴밀히 관리해야 할 리스크 요인’일 뿐이다. 과정이 조용하고 점진적이고 자연스러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그들의 전향은 오래전에 이미 완성됐다.
사상 검증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자연인이 아닌 임명직 고위 공직자, 그중에서도 남북관계를 다룰 주무부처 장관 후보자라면 국가관과 대북인식은 꼼꼼히 따져봐야 옳다. 그러나 ‘전향 선언’을 하라거나 ‘주사파가 아님’을 공개 고백하라 요구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주사파였던 적 없고, 지금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에게 ‘그럼 왜 나처럼 공개 전향을 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이는 건 ‘너의 비진정성’을 부각시켜 ‘나의 진정성’을 공인받으려는 내적 타자의 폭력적 생존 전략이다. 정약용 일가의 비극은 이 ‘진정성의 폭력’이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800년 후견자였던 정조가 죽자 정약용은 다시 한번 옥사에 휘말린다. 이번엔 형 약전·약종과 함께 혹독한 추국을 당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간다. 그는 과거의 행적과 사상을 거듭해 부정하며, 배교를 거부한 형 약종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영세를 준 매형 이승훈을 저주했다. 심지어 천주교도 색출법을 자청해 조언하고, 조카사위 황사영을 고발하기도 했다. 전향의 진정성을 입증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약종이 처형되고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정약용과 약전 형제는 남도로 긴 유배길을 떠나는 내내 형제와 일가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러나 약종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끝내 침묵했다. 신념과 핏줄을 배반해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19년의 유배가 풀린 뒤 고향에 돌아와 쓴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그 참담함을 이렇게 기록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 하였으나 그 행한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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