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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 칼럼] 가난의 대물림과 정치

등록 2020-07-23 16:22수정 2020-07-24 02:39

이런 상황에서 현실정치는 수구세력과 자유주의보수세력 간의 쟁투로 활기를 띤다. 공히 바깥의 적을 상정해 안을 결속시킨, 반북 국가주의자들과 반일 민족주의자들 간의 싸움이기도 한데, 속된 표현으로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 아주 좋았는데 오늘 그런대로 괜찮은 세력과, 어제까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늘 아주 좋은 세력 간에, 더 좋은 내일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장이라고.

홍세화│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장발장은행으로부터 대출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신청자들 중에는 전화 너머에서 울음을 터뜨려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한다. 그 복받쳐 오르는 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단순 절도 등의 잘못을 저질러 200만~3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는데 그만한 돈이 자기 수중에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에게서 빌릴 처지도 못 될 만큼 사회적 관계망도 열악한 사람들이다(장발장은행은 지금까지 863명에게 총 15억2700만여원을 대출해주었다. 재원은 8751명의 개인, 단체, 교회, 성당이 보내준 11억5천여만원의 성금이다). 2년 전부터 집행유예제, 연납제 등이 시행됐음에도 매년 3만명이 넘는 동시대인들이 벌금을 못 내 교도소에 갇힌다. 우리는 21대 국회에서 현행 총액벌금제 대신 수형자의 소득, 재산과 연동되는 일수벌금제로 바뀌어 은행 문을 닫을 수 있기를 바라는데, 현실정치의 주역 대부분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장발장은행은 교도소에서 몸으로 때울 처지도 못 되는 분들, 예컨대 돌봐야 할 어린 자식들이 있는 분들에겐 우선적으로 대출해준다. 그때마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어린 자식들에게는 어떤 장래가 예정되어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가 삶을 결정해버리는 사회, 끔찍하지 않습니까”(<진보집권플랜>)라는 말이 반어법이 아니라는 점을, 이 말의 발화자가 ‘기회의 사재기’ ‘스펙 품앗이’ 등을 통해 손수 보여주었던 만큼, 이 사회는 끔찍한 사회다. 가난이 곧 죄인 사회일 뿐만 아니라 대물림되는 사회에서, 그 어린 자식들에게 새벽 4시에 6411번 버스를 타야 하는 투명인간의 처지와 얼마나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을까? 세태를 빗대어 덧붙이자면, 유력 정치인들의 비서 자리도 기대하기 어려운 한편, 가진 자들의 ‘갑질’은 부단히 당해야 할 것이다.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기회가 있지 않으냐고? 자주 강조하는 말인데, 한국 사회에 “교육은 재생산을 합리화하는 과정”이라는 비판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기회의 평등”이 그럴듯한 수사가 된 배경 중에는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의 잔영이 아직 남아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제가 망하고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90년대까지는 사회 상층에 빈자리가 생긴데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괜찮은 일자리가 급격히 늘어 서민 출신도 끼어들 틈새가 컸다. 이른바 ‘586세대’가 특혜 세대가 된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고 앞으로는 더욱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은 그런 시대가 다시 오지 않으리란 점이다. 오히려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부제가 달린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는 한국 사회의 계층(세습)화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질적 발전이 둔화되어 ‘번듯한 일자리’가 줄고 있다. 이 가운데 부모의 경제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네트워크와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좋은 일자리’를 독식하고, 근로소득만으로는 살 수 없는 ‘비싼 주택’을 소유한 세습 중산층이 나타났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라 계층이다!”

앞으로 ‘명문대 졸업장’ ‘좋은 일자리’ ‘비싼 주택’ 소유와 세습에 따른 계층화는 공고해질 것이다. “지배계급의 재생산은 일정 부분 문화자본의 전달에 종속되는데, 문화자본은 병합된 자본이라는 고유성을 가지며, 따라서 십중팔구 타고나는 것”(피에르 부르디외)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정치는 수구세력과 자유주의보수세력 간의 쟁투로 활기를 띤다. 공히 바깥의 적을 상정해 안을 결속시킨, 반북 국가주의자들과 반일 민족주의자들 간의 싸움이기도 한데, 속된 표현으로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 아주 좋았는데 오늘 그런대로 괜찮은 세력과, 어제까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늘 아주 좋은 세력 간에, 더 좋은 내일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장이라고. 이 장에서는 ‘올바른 정치’의 경쟁보다 ‘누가 더 나쁜가’를 따지고 폭로하는 일이 주가 된다. 그들의 눈에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질곡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희망 없는 ‘이생망’의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 대신 조국 사태로 증폭되면서 함께 동굴에 갇힌 진영과 논리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의 저자 마이클 린치가 말한 “지적 오만함은 파벌적일 때 가장 치명적이다”를 시연한 ‘빠’와 ‘양념’의 정치들, 검찰과 언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작 정치의 소음들만 가득하다. 정치 현상의 놀라운 과잉에 비해 정작 정치는 실종된, 그리하여 사회가 보듬어지기는커녕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민생정치의 가능성이나 그 실마리는 청와대나 국회보다 경기도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경기도는 지난 21일 하남·과천·안산에 조성될 수도권 3기 새도시에 역세권을 중심으로 무주택자면 누구나 30년 이상 거주할 수 있는 ‘경기도형 기본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소득, 자산, 나이의 제한을 두지 않고 무주택자면 누구나 입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한겨레> 1면을 보고 떠오른 사례는 프랑스의 알리에 도(道)를 비롯한 곳곳에서 과거 영주가 살던 샤토(성)를 저임대료공공주택(HLM)으로 개조한 일이다. 1만명 이상 주민이 사는 지자체는 20% 이상 공공임대주택을 갖도록 돼 있는 법에 따른 조처였다(한국의 현재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6% 수준이다). 그 이튿날인 22일에 이재명 경기지사는 “경기도가 공공부문만이라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에게, 비정규직 중 고용기간이 짧을수록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같은 일을 한다면 직장이 안정적인 노동자와 불안정 노동자 중 누구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할까요?”라고 묻고,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불안정한 노동자에게 보수를 오히려 덜 주어 중복차별을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와 소속 공공기관 직접고용 기간제 노동자 2094명이 수혜 대상이라고 하는데, 관계자는 “최소 5%를 기준으로 프랑스의 불안정 고용 보상 수당 지급 사례를 참고해 최대 10%를 적용하는 방안이 적정하다”고 밝혔다.

계층상승의 길은 막혔고, 양극화가 심해질 뿐 지난날에는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낙수효과도 사라졌다. 대물림되는 이 땅의 가난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면서 너덜너덜해졌다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유럽의 사민주의 정책의 잔해가 한국 현실정치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라면 그저 감읍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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