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850, 캔버스에 유채, 316 x 670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이주은 ㅣ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나는 ‘적절한’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적절함은 이미지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활용도가 높은 단어 중 하나이다. 의미의 층위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고대 로마의 저술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가 적절함에 대해 언술한 적 있다. 키케로 식의 적절함이란 사물이나 사람이 각자 고유한 상황에 알맞게 존재하고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사발은 국물이 새지 않아야 적절한 상태이고, 군인은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적절하다는 것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명백한 도리로 규정된다. 그러나 예술에서 거론되는 적절함은 조금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본분이라기보다는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인 쿠르베(1819~1877)가 그린 <오르낭의 장례식>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데, 세로가 3m가 넘고, 가로가 7m에 가까운 매우 큰 캔버스에 그려졌다. 천장이 2m 남짓한 평범한 아파트 거실에는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큰 그림이라고 상상하면 된다.
‘엄청 크군요. 그림 속 장례식의 주인공이 아마 대단한 인물이겠죠?’ ‘화가가 기리고픈 장엄하고 기념비적인 죽음을 그렸나 봅니다.’ 당시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장례식 장면을 거대 규모로 기록해두었다는 것은 위대한 죽음이었거나, 아니면 그림을 의뢰한 사람이 권력자이거나 부자였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바꾸어 말하면 위대함, 권력, 그리고 부는 큰 그림이 그려지기에 적절한 가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르낭의 장례식>은 사실상 쿠르베가 몇번 만난 적도 없는 가난한 먼 친척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인물들은 다들 고인과 적당히 인사만 트고 지내는 마을 사람들인 듯 죽은 이가 땅속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크게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작은 마을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의례가 틀림없고, 그런 일상적인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대형 작품을 기획한다는 것은 무언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화가가 캔버스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다루어서 관람자들이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기대치를 위반한 셈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그림으로 먹고살던 거리의 화가들 중에는 쿠르베 못지않게 잘 그린다고 소문난 이가 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잊힌 반면 쿠르베는 만인이 기억하는 화가로 남았다. 그 이유는 뭘까. 쿠르베는 상식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예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쿠르베처럼 적절함의 개념을 마음대로 주무를 줄 아는 이를 창의적인 예술가라고 부른다.
적절함은, 뛰어남과는 별개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오직 그것에서 벗어날 때에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이 줄곧 적절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해서 박수갈채를 받는다거나 칭찬을 듣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반대어인 ‘부적절함’을 떠올리는 순간, 평소 자신의 명예를 책임져온 비장의 무기가 바로 적절함이었다는 것을 단번에 깨닫게 된다. 평생을 적절하게 살아왔어도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단 하나라도 걸려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단번에 금이 가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예술가가 아니라면, 특히 교육자나 공무원, 그리고 정치가라면, 적절함의 개념을 넘나드는 모험은 위험할 수 있다. 부적절함의 결과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창의적이라고까지 칭송을 받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는 예술작품밖에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