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옛 시절’은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개의 충격과 함께 막을 내렸다. 한국과 일본의 전략적 이해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양국의 대중·대북관과 동아시아 미래상에 대한 견해는 크게 다르며, 그래서 서로를 향한 미움과 불신을 쌓아가는 ‘구조적 불화’에 빠지고 말았다.
“야마구치현과 아키타현에서 추진해 오던 ‘이지스 어쇼어’의 배치 계획을 중지하겠습니다.”
지난달 15일 오후 5시30분. 고노 다로 방위상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한-일 관계에 또 한번의 평지풍파를 몰고 올 긴급 소식을 꺼내 들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연두색 마스크를 쓴 고노 방위상은 다소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2017년 말부터 추진해 오던 이지스 어쇼어 배치 계획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발표였기 때문에 도쿄 이치가야 방위성 A동 1층 입구에 모인 기자들 사이에서 떠들썩한 웅성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일본은 그동안 북한이 자국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쏠 경우 1차로 동해상에 떠 있는 이지스함이 SM-3 미사일을 발사해 막고, 2차로는 도쿄 등 대도시에 배치된 패트리엇(PAC)-3 미사일을 쏘아 요격한다는 ‘이중 미사일방어(MD) 체제’를 구축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2017년 들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커지자 그해 12월 ‘바다 위의 방패’라 불리는 이지스함에 장착된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육지로 옮겨 놓은 ‘이지스 어쇼어’를 도입해 ‘삼중 방어 체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2023년을 목표로 설치 계획을 추진하다 이날 요격 미사일을 발사할 때 떨어지는 부스터로부터 주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계획을 돌연 중지한 것이다.
이 결정은 곧 동아시아 전체를 거대한 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는 연쇄 파문을 몰고 왔다. 사흘 뒤인 18일 기자회견에 나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우리 나라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더 엄혹해지고 있고, 한반도에선 긴박함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며 “올여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새 안보전략을) 철저히 논의해 신속히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이를 신호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려면 일본이 군사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자민당 내 중진 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달 30일 ‘미사일 방위에 관한 검토팀’을 만들어 일본이 직접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적 기지 공격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회의 뒤 나카타니 겐 전 방위상은 현행 헌법의 전수방위(무력은 오로지 방위만을 위해 사용) 원칙을 지키면서 “일본이 적의 미사일 기지를 때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오노데라 이쓰노리 전 방위상 역시 8일 개최된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적의 미사일을 막는 데는 발사 전이나 발사 직후가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이라며 힘을 실었다. 그러자 고노 방위상은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공식 검토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일본이 머잖아 미국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북한을 타격하는 능력을 확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일본이 적 기지 공격능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나카타니는 2015년 10월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의 주권 범위는 휴전선 남쪽”이라는 발언을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이 발언은 일본이 북한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느낀다면, ‘한국의 승인 없이’ 무력행사에 나설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사고방식은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문재인 대통령 2017년 8·15 경축사)는 한국인의 믿음과 결코 양립하기 힘든 것이다. 일본이 적 기지 공격능력을 보유하고, 이를 실제 행사하려 한다면, 한·일은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보상 등을 둘러싼 ‘역사 갈등’이나 불화수소 등의 수출규제를 둘러싼 ‘경제 갈등’을 넘어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기는 ‘안보 영역’에서 본격적인 대립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지난해 7월 일본의 불화수소 등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악화되자, 한·일 모두에선 양국 관계의 전성기였던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 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개의 충격으로 이미 신냉전에 돌입한 동아시아에서 ‘좋았던 옛 시절’로 복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는 크게 세 시기를 거쳐왔다. 제1기는 국교 정상화부터 1980년대 말 냉전 해체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기본 조건은 ‘냉전’이었다. 살벌한 냉전 질서는 양국에 협력을 강제했다. 두 나라는 역사문제를 봉인하고 경제협력의 길을 연 이른바 1965년 청구권 협정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한국은 공산권의 위협에서 일본을 방어하는 일종의 ‘방파제’ 구실을 수행했고, 일본은 그런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라는 경제협력자금과 기술력을 제공하며 뒤를 받쳤다.
이 시기 한-일 관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은 오구라 가즈오 전 주한 일본대사가 쓴 <한일 경제협력자금 100억달러의 비밀>이라는 책에 담겨 있다. 12·12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1981년 4월 일본을 향해 느닷없이 “한국은 자유진영의 주축으로 국가 예산의 35%를 국방 예산으로 쓰고 있다. 그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국가는 일본”이라며 100억달러란 천문학적 경제협력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첫 반응은 “한국 정부가 미쳤다”(기우치 아키타네 당시 아시아국장)였지만, 공식과 비선 라인을 넘나드는 1년 반에 걸친 기묘한 협상 끝에 결국 40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 시기엔 오히려 일본이 나서 중국(당시 중공)과 국교 정상화를 원하는 한국의 의향을 전하기도 했다. 한·일의 전략적 이해는 일치했고, 그랬기에 같은 곳을 바라보며 힘을 합칠 수 있었다.
제2기는 냉전이 해체된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기 전인 2000년대 말까지로 구분된다. 냉전 해체와 함께 1987년 ‘6월 혁명’으로 한국이 민주화되자 일제 식민지배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피해자들의 배상·보상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받은 한·일은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일본 정부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와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일본의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라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이런 성과를 모아 서로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1998년 10월 발표했다. 이를 통해 대중문화가 상호 개방됐고, 2000년대 중반 일본 사회에서 화려한 ‘한류 붐’이 꽃필 수 있었다.
그러나 ‘좋았던 옛 시절’은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개의 충격과 함께 막을 내렸다. 2010년 이후 중국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 분쟁을 겪은 일본은 중국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동맹 강화에 나섰다. 두 나라는 2015년 4월 미-일 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해 미-일 동맹을 그동안의 ‘지역동맹’에서 ‘글로벌동맹’으로 위상과 역할을 강화시켰다. 이후 이들은 미국을 매개로 따로 기능하고 있던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한 축으로 묶는 한-미-일 3각동맹 구축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한-일 협력의 중대한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를 2015년 12월 12·28 합의로 봉합하고, 그 기반 위에서 2016년 11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고, 2017년 4월 사드 배치까지 성큼 나아갈 수 있었다.
이 흐름에 제동을 건 것은 2016년 말 한국 민중들의 촛불집회였다. 이대로 한-미-일 3각동맹에 끌려들어가는 것에 큰 불안감을 느낀 한국인들은 2017년 5월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밀어올렸다. 문 대통령은 취임 뒤 12·28 합의를 무력화한 데 이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간 타협을 촉진했다. 북·중을 억제해야 한다는 ‘현상유지’ 전략을 고수하던 일본은 한국의 ‘현상변경’ 시도를 위태롭게 바라보며 강한 저항에 나섰다. 이것이 지난 3년간 진행된 한-일 대립의 정체다. 신냉전이 ‘뉴노멀’(새로운 균형)을 찾을 때까지 이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전략적 이해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양국의 대중·대북관과 동아시아 미래상에 대한 견해는 크게 다르며, 그래서 서로를 향한 미움과 불신을 쌓아가는 ‘구조적 불화’에 빠지고 말았다.
앞으로 10여회에 걸쳐 문재인 정권 3년 동안 이뤄진 한-일 대립의 전개 과정을 복기해 보려 한다. 다음 주제는 문재인 정권의 첫번째 선택이었던 12·28 합의 무력화 결정과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들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등을 썼고,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