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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기억의 존중 / 정영목

등록 2020-07-10 16:43수정 2020-07-11 14:13

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라떼는 말이야”라는 유행어를 자주 듣는다. 어떻게 금을 긋더라도 나는 이 은어가 노리는 과녁에 해당하는 집단에 속할 것이다. 그런 내가 이 말의 뜻을 알 정도면 이 말은 유행의 끝물에 온 것일 테지만, 아마도 이를 대체할 다른 풍자의 언어는 계속 새로 태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유행어를 탄생시킨 좌절감은 쉬이 해소될 길이 보이지 않고, “라떼”를 마시며 그 좌절감을 자극하는 집단은 물러나기는커녕 쥔 것을 나누는 것도 아까워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가면 얼마 전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꼰대”도 이 말과 연결되고, “n86세대”라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표현도 연결되는 듯하다.

물론 “n86세대”가 “라떼는 말이야”라고 입을 여는 순간을 희화화하는 것은 기억을 둘러싼 대립의 한 측면이다. 가령 “586세대”라는 말은 지금은 50대가 된 60년대생 80년대 학번에 속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이런 표현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1980년대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공유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다. 단지 유지 정도가 아니라, “라떼는 말이야” 하는 식으로 자신이 기억하는 방식을 강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만큼 이들은 모든 면에서 “부심 쩌는” 집단인데, 거기에 자의식도 강하여 스스로 “꼰대”나 “라떼” 등의 표현을 자조적으로 사용하면서 적절히 삼갈 방도를 찾기까지 하니, 이들을 놀림 대상으로 삼고 싶은 입장에서는 더 얄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분통이 터지는 일은, 이 “라떼” 집단의 수십년 된 기억이 여전히 그냥 무시해버릴 수 없는 현실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들 자신이 그 힘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지난 총선의 결과를 놓고 늘 한쪽으로 기울었다고 한탄하던 운동장이 이제 반대로 기울었다는 진단도 나왔다. 그 요인 가운데 하나가 “n86”의 n이 4에서 5로 바뀐 것이라는 분석도 있고, 이것이 6으로 바뀌면 현재의 운동장 기울기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마저 있는 듯하다. 어떻게 한 집단이 나이를 먹는다고 운동장 기울기가 바뀔까? 여러 설명이 있겠지만,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총선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마침 “n86세대”의 “부심”과 현 실태의 괴리가 외설적으로 전시되던 즈음이라, 거품이 꺼질 듯하던 “부심”도 다시 회복되어 이들이 더욱더 “라떼”를 들이켤 듯해 보이니, 이로 인해 또 많은 이들은 함께 승리를 기뻐하면서도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착잡한 표정을 상상하면서, “라떼” 집단이 기억의 위력에 다시 큰 “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이 시점이 사실은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착잡해져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자신의 기억의 유효기간을 따져봐야 할 수도 있다. 자욱하던 먼지가 가라앉은 지금 운동장이 기울어진 것은 맞지만 보이는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게 없을 뿐 아니라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억은 이 삭막한 운동장의 풍경을 바꾸는 데 어떤 보탬이 될까? 노스탤지어가 지배하는 술상의 안주로 전락하지 않고 어떤 보탬이라도 되려면, 그들의 경험은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기억이란 해석되고 편집되고 번역된 현실이다. 지금 이들의 기억은 그 기억에 대한 정당한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독자들이 읽고 공감할 수 있도록, 그것을 자신의 기억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 기억을 존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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