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은 고르바초프 같은 권력의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문명이나 발전이라는 것, 이념이나 체제라는 것의 실제가 인간 삶의 현실에 얼마나 맞춤하게 조응하는지, 혹 적폐청산 작업이 새 적폐를 만드는 건 아닌지, 그 넘치고 모자람의 불화가 만드는 역사의 고비를 우리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모스크바를 구경했던 것은 31년 전인 1989년 가을이었다. 거기서 열린 국제도서전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는데 일행 20여명의 출판인들처럼 내 관심은 책보다는 ‘철의 장막’ 안의 소련 구경이었다. 벨그라드 호텔에 체크인한 첫날 저녁 우리 몇은 근처 거리를 구경하러 나섰는데, 이건 좀 의외였다. 곳곳에 팬 홈에 물이 고여 어두운 거리는 지저분했고 여기저기 선 현판은 대패질도 하지 않은 각목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태 전에 처음 가본 미국의 뉴욕은 고사하고 아직 후진국의 열등감을 지우지 못한 한국의 서울만도 못한 꼴을 많이 보아야 했다. 가령 외국인들은 호텔을 자유로 들락거리는데 정작 소련 시민은 정문 앞을 지키는 경찰이 신분증을 검사하며 투숙객이 동행해야 출입이 허가된다든가, 택시 요금을 우리 담배 두 갑으로 계산할 수 있다든가, 달러를 루블로 바꾸자고 환전상들이 달라붙는데 1달러당 0.6루블의 공정환율과는 상관없이 10루블로 환전되는 등등이었다.
서울의 교보보다는 작지만 모스크바의 중심가에 자리한 대형 서점에서 꼭 사고 싶었던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볼 수 없었고 도시마다 거리 이름으로 붙여 자랑하는 그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영어로 번역된 것만 매대에 놓여 있었다. 당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여서 나도 떠나기 전 국역판으로 읽은 리바코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도 그 서점에는 없었는데 요행히 키예프행 국내공항의 신문스탠드에서 그 책을 발견해 살 수 있었다. 며칠 뒤 그 작가를 만났을 때 그 책의 여러 판본 중 그것이 가장 잘 편집되었다며 자필 서명을 해주어 나는 뜻밖에 횡재한 기분이었다. 밤거리에서 젊은 청년이 일제 싸구려 계산기를 보이며 손짓 몸짓으로 그 용도와 값을 묻는데 그건 30여년 전 사상 최초의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린 나라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마음먹고 구경한 도스토옙스키의 집은 참으로 풍요하고 의젓했다. 이 상반된 풍경은 오웰의 <1984년>을 연상시켰다.
최근 국역된 마이클 돕스의 <1991>(허승철 옮김)을 보면 내가 이런 소련을 구경하던 때가 미국과 세계를 반분해 주도하던 소비에트가 쇠퇴해갈 즈음이었다. 주소련 영국 외교관의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성장했고 주로 동구권을 취재한 <워싱턴 포스트> 기자로 소개된 저자는 소비에트 체제가 파탄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이미 10년 전의 폴란드 자유노조부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가 지지난
이 칼럼에서 소개한 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은 소비에트의 이념 체제와 실제 삶의 문화 사이의 균열이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이 책은 그 이념 체제의 권력 내부 붕괴가 그로부터 20년 뒤에 파탄의 징조로 나타나고 있음을 치밀한 취재로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80년 바웬사를 중심으로 한 그단스크의 레닌조선소 파업이 “공산주의 붕괴의 전조가 되는 사건”으로 “노동자가 노동자의 국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역설의 첫 사건이었다. 다음 사건이 1983년 9월 소련군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으로 269명의 민간 탑승자 전원이 희생된 이 일에 대해 저자는 ‘바보들의 행진’이 일으킨 “국익에 반하는 사건”으로 “반대의견을 억누르고 새로운 도전을 유연하게 다룰 능력이 없는 체제, 상식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총체적인 우둔함을 보여준” 사태로 지적하고 있다.
두 세대 동안 지배해온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의 무식과 무능, 부패와 타락을 깨트리고 새로운 세대 고르바초프가 개방과 민주화를 주장하며 러시아의 총체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이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소련을 구경한 것은 이런 변화가 한창 폭넓게 진행되고 있는 참이었다. 비로소 전자문물이 유통되고 반공국가인 한국인 여행도 허락되며 만델슈탐의 연극이 공연되고 미국으로 망명한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번역되는 해빙기를 맞고 발트3국이 독립했고, 풍부한 석유 자원 탓에 서구에서의 에너지 절약 연구를 도외시하여 엄청난 체르노빌 사태가 일어났는데도 무능한 정부는 대책 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원고 없이 연설할 수 있는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볼셰비키의 이념 포기를 선언하며 전개한 개혁 정책은 강렬했음에도 관료주의의 반동이 집요했고 공산당 관리들의 무기력과 부패도 완강했다.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쿠데타가 옐친의 주도로 허망하게 제압당하면서 고르바초프의 퇴각도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소련 공산당의 소멸과 공산주의의 자멸이 함께 오면서 마침내 ‘러시아 권력의 아우라’가 스러져버린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급박하게 전개된 이 단계를 ‘프롤레타리아의 반란’(1979년 12월), ‘체제의 반란’(1983년 9월), ‘민족의 반란’(1989년 2월), ‘공산당의 반란’(1990년 12월) 등 점진적인 반란의 단계적 진화로 정리하면서 에필로그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해 내린 저자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온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이자, 자신이 추진한 개혁에 추월당한 개혁자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다민족 제국을 해체되게 한 황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정보화시대로 이끌려고 했지만 소련의 몰락을 주재할 운명에 처했다. 혁명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어도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체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다가 오히려 무너트리는 데 성공한” 참으로 보기 힘든 아이러니의 본보기가 되어 반세기 동안 세계를 괴롭혀온 냉전체제를 무너트린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세계와 우리나라는 ‘코로나19’란 멋진 이름의 세기적 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부유하고 의료기술이 발전한 미국과 서구에서 더 심하게 창궐하고 있었다. 문명한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의 역습에 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의 아이러니인가? 이제 세계사를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의 비시(BC)와 ‘역병 이후’(After Disease)의 에이디(AD)로 나누어보자는 우스개를 헛말로 돌릴 수 없는 역설의 시대에 부닥친 것이다. 역설은 고르바초프 같은 권력의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문명이나 발전이라는 것, 이념이나 체제라는 것의 실제가 인간 삶의 현실에 얼마나 맞춤하게 조응하는지, 혹 적폐청산 작업이 새 적폐를 만드는 건 아닌지, 그 넘치고 모자람의 불화가 만드는 역사의 고비를 우리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병익 ㅣ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