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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코로나 시대의 인문학 / 김우재

등록 2020-06-29 18:28수정 2020-06-30 13:19

김우재 ㅣ 초파리 유전학자

커다란 강의실 앞에서 교수 혼자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앉아 강의를 듣는 풍경, 현재 우리가 아는 대학의 모습은 서양 중세의 대학과 달라진 게 없다. 근대과학이 대학의 학제에 포함되면서 실험실이 생겨났고, 이후 미국에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연구중심대학이 파생된 것이 중세 이후 변화의 전부였다. 대학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변화에 게으르고 무책임한 조직이다.

코로나 사태로 2020년 1학기가 사라졌다. 몇몇 대학의 학생들이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고, 승리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린다. 교수들은 온라인 강의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나이 든 교수들은 해본 적 없는 온라인 강의에 당황했다. 아예 유튜브에 있는 강의로 자신의 수업을 대체한 노교수의 이야기가 들린다. 교수란 직업 또한, 가장 게으르고 무책임한 전문직이 된 지 오래다.

디지털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지식을 습득한다. 오픈 액세스의 등장으로 논문을 무료로 읽는 일도 가능해졌고, 지식 습득을 가로막던 거대한 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전세계에서 가장 강의를 잘하는 교수의 과목을 무료로 들을 수 있고, 심지어 학위도 취득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모든 대학이 똑같은 과목을 모두 개설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전세계 모든 대학생이 같은 과목을 최고 수준의 교수에게 똑같이 들을 수 있다면, 교육의 기회 평등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강의팔이로 등록금을 받던 대학의 비즈니스 모델은 끝장났다.

대학은 원래 학문을 탐구하는 곳으로 시작되었고, 그 본질을 지키면서 사상의 자유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추동해온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 대학은 더 이상 그런 곳이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 전락했다. 대학이 그렇게 변질된 이유는, 대학이 학벌이라는 계급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의 중심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습자본주의 사회에서 실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말은 대부분 허구다. 대학은 자본을 세습하는 하나의 통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학이 변질되면서, 학문 탐구를 담당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대학원으로 이전되었다. 대학이 추구하던 원래 모습을 간직한 곳은 대학원이다. 하지만 모든 학문에 대학원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비싼 장비와 실험재료 그리고 여러 해에 걸친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와, 주로 텍스트 독해와 강독 등으로 구성된 인문학이 같을 수는 없다. 코로나19가 가속화시킨 교육의 디지털화 현상에서, 가장 큰 압력을 받을 분야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디지털 시대에 더 이상 물리적으로 대학에 구속될 이유가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학이 상징처럼 지켜온 인문학은 이미 대학에서 고사 중이었다. 오래전부터 국내 학자들이 떠들어온 인문학의 위기란, 기껏해야 대학 인문학의 위기였을 뿐이고, 그조차도 자세히 파헤치면 대학 인문학 교수들의 일자리 위기였을 뿐이다.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와 동치될 수 없다. 인문학 교수들이 사라져도, 인문학은 인터넷으로 이전된 수많은 텍스트들 속에서 얼마든지 연구되고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문학은 대학이라는 물리적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문학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대학이라는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학문 영역들부터, 대학한테 버림받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인문학은 학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학 밖으로 나가야 한다. 기실 오래전부터 인문학은 대학 밖에서 새로운 실험을 모색 중이기도 했다. 대학에 머물고 싶다면, 인문학은 사활을 걸고 변질된 대학에 맞서 싸워야 한다. 세습자본주의가 지키려 하는 학벌체제를 파괴할 수 없다면, 대학은 이 지긋지긋한 게으름을 얼마든 연장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는 인문학을 시험에 들게 만들고 있다. 부디 인문학자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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