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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박사는 오늘도 반성문을 쓴다 / 김은형

등록 2020-06-25 14:47수정 2020-06-26 02:38

그래픽 이해영
그래픽 이해영

23일 야구선수 강정호의 사과 기자회견 뒤 국내 복귀에 대한 야구팬들의 여론이 더 악화됐다. “이기적으로 살아온 과거를 후회한다“ “유소년 야구를 위해 재능 기부하겠다” “음주운전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리며 살겠다“ 등 구구절절 후회와 사과, 반성이 가득했지만 조금의 진심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번의 음주운전과 뺑소니 사고, 실형선고 뒤에도 사실상 침묵하다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방출된 다음에야 반성한다면서 국내에 복귀하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니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나. 많은 팬들이 말하듯이,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복귀해서 수억원의 연봉을 챙기며 간간이 봉사하는 삶을 살 게 아니라 그냥 봉사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엔(n)번방 ‘디지털 성착취’ 사건의 주범 ‘박사’ 조주빈이 첫 재판이 열린 지난 11일까지 22통의 반성문을 냈다고 한다. 5월1일부터 쓰기 시작해 중순 이후에는 거의 매일 꼬박꼬박 제출했다. 공개되지 않은 반성문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의 유쾌하면서도 뜨거운 산문집 <내 청춘의 감옥>에는 수감자들의 반성문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며 두차례 투옥됐던 그는 주변 죄수들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틈만 나면 쓰는 탄원서를 지켜보다가 유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하면 분명한 주장 없이 횡설수설을 푸는 편지이고, ‘훌륭하신 재판장님’으로 시작하면 유·무죄를 다투는 편지, ‘자상하신 재판장님’으로 시작하는 건 유죄는 인정하면서 양형을 줄여 달라는 편지였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보편적인 규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조주빈은 ‘자상하신 재판장님’이라고 반성문을 시작했을까?

범죄자 교육 상담을 오랫동안 해온 일본의 임상교육학자 오카모토 시게키는 책 <반성의 역설>에서 “반성문은 백해무익하다”고 단언한다. 그가 반성과 갱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반성은 갱생의 출발점이지만 긴 시간 자신의 내면을 끈질기고 고통스럽게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죄의식과 사죄의 마음이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한 후 들켰을 때 인간의 심리는 ‘후회’일 뿐 ‘반성’ 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소년분류심사원과 같은 일본 청소년감별소에서 실시한 연구자료도 이를 뒷받침한다. 입소한 청소년들에게 ‘내가 피해를 준 사람 목록’을 작성해 편지를 쓰게 했더니 목록의 상위를 차지한 건 80% 이상이 부모나 친구들이었지 피해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가족 등 주변이 망가진 게 후회될 뿐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반성은 없다는 의미다. 최근 재판부에 제출한 반성문에서 가족과 지인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써 판사에게 “이렇게 쓰면 안 내는 게 낫다”고 핀잔을 받은 박사방 공범자 강아무개씨도 같은 경우다. 다만 저자의 견해에 따른다면 이런 반성문은 적어도 반성하지 않는다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으니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평생 반성하면서 살겠다는 새빨간 거짓말의 반성문보다는 덜 유해하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내놓은 ‘아동·청소년 대상 재범 방지 교육 보고서’(2019)를 보면 교육 이수명령을 받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중 “법적 처벌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은 아니었다”, “잘못을 인정하지만 법적 처벌 수위가 지나치게 높다”, “잘못이 전혀 없고, 부당하게 처벌을 받았다” 등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과잉처벌을 받았다고 답한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한국의 아동·청소년 성범죄 형량이 지나치게 관대한데도 정작 가해자 상당수는 반성하기 보다 억울해한다는 의미다.

<반성의 역설>의 저자는 피고인이 정말 반성하고 있는지 가려내는 방법이 딱 한가지 있다고 말한다. 판결이 내려진 후에 항소하는지 아니면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판결을 인정하는 행동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한다는 증거다. 실제로 성범죄를 일으킨 연예인들이 눈물 흘리며 평생 반성하겠다고 다짐하고는 판결 뒤 곧바로 항소하는 모습은 너무 전형적이라 실소가 나온다. 박사를 비롯해 엔번방 주모자들도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열심히 반성문을 쓸 것이다. 500장이 넘는 반성문을 내고 고작 1년6개월 형을 받은 다크웹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가 이들에게는 희망의 깃발일지도 모르겠다. 반성 없는 반성문의 헛된 꿈을 이제는 깰 때도 됐다.

김은형 l
논설위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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