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수 ㅣ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언제부턴가 보도 경쟁이 시작되면 일단 양적으로 엄청난 수의 기사가 쏟아진다. 포털에서 지난 두달 동안 윤미향이나 정의기억연대(정의연)로 검색을 해보니 기사 건수가 각각 2만건이 넘는다. 그 중요성과 상관없이 특정 사안에 대하여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쯤 되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기사의 질만 좋다면 양이 무슨 문제랴. 하지만 기사의 상당수는 비슷한 내용의 단발성 기사였고, 과장과 억측으로 점철된 악의적인 소위 ‘단독’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기사가 쏟아지는 사이에, 이미 윤미향과 정의연은 회계부정으로 할머니들에게 지원되어야 하는 기부금을 빼돌려 개인 주택을 사고, 자식 유학을 보내고, 관련 단체들과 그 구성원들에게 일감을 주고, 가족에게 수천만원짜리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거액의 술판을 벌인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혀버렸다. 나중에 사실무근임이 확인되어도 낙인은 쉽게 원상복귀되지 않는다.
보도 가치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개중에는 뼈아픈 지적도 있었다. 시민단체의 돈 관리가 엄정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당한 지적이고, 피해자와 지원단체의 관계 문제도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대중적인 운동으로 성장했고 국제적인 인권운동으로 도약한 ‘위안부’ 운동의 현주소를 찬찬히 되돌아보는 것 역시 지금이 적기라면 적기다. 그런데 무분별한 보도로 특정 개인과 단체를 만신창이로 만들면 오히려 이런 중요한 문제들이 뒷전으로 밀린다. 걸면 걸리고 아니면 만다는 식으로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면서 옥석이 가려질 리 만무하다.
언론 환경이 다변화된 상황에서 모든 언론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매체 중 상당수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는 정론지 또는 전통 미디어라는 사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전통 미디어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통 미디어의 강점은 무엇보다 기사 검증 시스템이다. 복수의 기자들이 크로스체킹을 하고 데스크가 제3자의 시각에서 기사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때로는 기자협회나 노조가 내부 감시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선 기자들이 과욕을 부리거나 편견이 열정으로 둔갑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들도 바로 이 시스템으로 차단할 수 있다. 그런데 윤미향과 정의연을 둘러싼 보도에서 이 검증 시스템을 제대로 작동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시스템이 작동해도 오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온라인을 통한 속보 경쟁이 분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철저히 검증된 기사만 써야 한다고 강변하긴 쉽지 않다. 한편으로는 검증 시스템을 가다듬으면서, 나중에라도 오보를 수정하는 시스템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사후 검증과 정정 시스템 또한 전통 미디어의 장점이다. 관련하여 최근 눈에 띄는 두 장면이 있었다. 첫번째는 <한겨레>의 윤석열 별장 접대 보도에 대한 정정과 사과다. 편집인이 조사팀장이 되어 직접 검증에 나섰고,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자체 게이트키핑이 부실했음을 인정했다. 오랫동안 신중하게 준비했다는 취재보도준칙에는 신속성보다는 정확성을 우선시한다는 원칙이 구체화되어 있고, 철저한 상호 검증 절차를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두번째는 최근 <조선일보>가 “오직 팩트”를 추구한다며 2면에 오보 정정 코너를 상설화한다는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신문 귀퉁이에 단순한 표기 실수 정도만 정정해왔던 기존 관행에 비추어 보면 파격적이다. 정확한 보도 없이 뉴미디어 시대의 난국을 돌파할 수 없다는 몸부림으로 이해된다. 아직까지 그럴듯한 오보 정정은 눈에 띄지 않지만 말이다.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 대한 보도가 어떻게 정리될지 살펴보는 것은 전통 미디어의 향방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의혹 속에서 ‘위안부’ 운동, 피해자 지원 운동, 시민단체운동이 반성하고 거듭나야 할 지점들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의 기사 중 오류거나 허위임이 밝혀진다면 주저 없이 정정하고 검증 시스템을 가다듬어야 한다. 전통 미디어의 진짜 위기는, 재기발랄하게 치고 나가는 대안 미디어의 혁신을 따라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언론이 해야 마땅한 기본적인 책무를 방기한 것에서 찾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