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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장승은 누가 잘랐을까? / 이세영

등록 2020-06-14 19:06수정 2020-06-15 12:43

이세영

정치팀장

신앙심이 각별한 친구였다. 교문과 학생회관 사이 흰색 화강암 건물 앞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학생 틈에 그가 있었다. 입학 직후 모임에 들어간 친구는 도제식으로 진행된다는 성경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을 비판하는 노교수를 향해 “구원을 믿느냐”는 질문으로 당혹감을 안겼고, 최루탄 분말과 보도블록 파편이 어지러운 교문 앞을 제 키보다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가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런 그였으니, 도서관 앞 광장 한쪽에 ‘민족해방대장군’ ‘조국통일여장군’이란 이름의 대형 장승 2기를 세우겠다는 총학생회 계획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우상 숭배’ ‘기독신앙에 대한 모욕’이라는 기독학생단체의 거센 반발 속에 비판과 반박 대자보가 도서관 외벽을 채웠다. 친구는 총학생회가 마련한 공청회에 나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상 건립을 결코 두고 보지 않겠다”며 눈을 부라렸다. 표정과 어투가 어찌나 비장했던지 현장을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가 그의 발언을 기사에 인용할 정도였다. “이날 공청회에서 신학과 한 학생은 ‘장승을 세운 것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이므로 극단적 행동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했다.”(1990년 6월6일)

세운 지 열흘 만에 몸통 일부가 훼손되는 수난을 겪은 장승들은 이듬해 1월, 하루 간격으로 밑동이 잘려나갔다. 목격자도 물증도 없었다. 장승 건립을 주도한 학생들은 분노했으나 학내에서 벌어진 손괴 사건에 경찰 수사를 의뢰하는 것은 당시 분위기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학교 당국 역시 공연히 수사기관을 끌어들여 문제를 키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유야무야됐다.

30년 전 장승 사건이 다시 화제에 오른 건 최근의 일이다. 입학 30주년을 맞는 동기생들의 모교 방문 행사를 앞두고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이 개설됐다. 대화창에 등장한 그의 이름을 보고 누군가 농반진반 추궁했다. “이제 털어놓을 때도 되지 않았어?” 대화창엔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친구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볼 때마다 잘라버리고 싶었지.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해? 군에 있을 때 진지공사 하면서 알게 된 건데, 그 정도 통나무를 신속하게 베고 사라지려면 전기톱 숙련 기술자에 조수 한두명은 있어야 해.”

동기 몇과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도권의 한 도시에서 개방직 공무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장승 사건 이후 ‘골수 근본주의자’로 낙인찍어 말도 섞지 않았지만, 세월을 건너뛰어 만난 그의 생각은 우리 세대의 평균치만큼 ‘리버럴’했다. 정치사회적 공통 경험이 누적되면서 세대 내 동질성이 그만큼 뚜렷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분노는 매한가지였고,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은 그가 나보다 확고해 보였다.

지난해 ‘조국 정국’을 거치며 절감한 사실은, 열정과 열정이 부딪치는 대화에서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확인되는 순간 만남은 기피되고 관계는 멀어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소원해진 사이가 주변에 여럿인데, ‘조국 재판’과 ‘윤미향 정국’의 페이스북은 여전히 전쟁터다. ‘팔로 취소’ ‘소식 숨기기’는 단절의 명시적 선언 없이 인간관계의 위기를 넘기려는 페북 이용자들의 자구 수단이 됐다. 열정이 식고 대상과의 거리두기가 수월해질 때쯤이면, 진실의 어렴풋한 그림자와 함께 그들과의 인연과 우정도 되살아날까?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누구보다 깊었던 시인 김수영은 ‘10년’을 일러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엔 너무나 짧은 세월”(‘누이야 장하고나’)이라고 썼다. 하물며 1년은 얼마나 더 짧은가. 내가 친구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도 30년이 걸렸다.

덧붙임: 친구는 장승 절단의 유력 용의자로 학교 당국을 지목했다.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라는 재단과 동문들의 압력은 커지는데 총학생회는 말을 듣지 않으니, 시설부서 직원과 장비를 동원해 ‘처리’하지 않았겠냐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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