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코로나 사태 이후에도 부고 메일을 계속 받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조문은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문구 정도다. 장례식장에 직접 갈지 머뭇거릴 새 없이 조의금을 보낼 계좌번호를 수소문한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장례식 풍경은 간소했다. 특히 학계에서 만난 지인의 부모상을 갈 때마다 문턱에서 서성이다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상을 치르는 사람과 조의를 표하는 사람 사이의 문턱, “자세히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와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만나는 문턱. 그 문턱에 걸터앉기 멋쩍은 조문객에게 닻을 내리기라도 하듯 장례식장의 무게감은 대단했다. 상주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케 하는 각종 화환을 지나 유가족에게 위로를 건네기까지 거쳐야 할 의례는 간단했지만, 행여 실수라도 할까 조바심이 컸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할 일을 마쳤다고 안도할 즈음 고인이 오랫동안 요양원에 계셨단 얘길 듣고 나면 다시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때 혼돈을 접으려면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될 것에 관한 암묵적 규범을 따라야 한다. 그 상주가 ‘교수’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전자라면, 그 교수의 부모가 ‘노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은 후자다.
생산성과 효율성 바깥의 삶에 낙인을 씌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노인의 시간에 금기를 두른다. 아이가 내보이는 의존성은 그가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때문에 관대한 취급을 받지만, 병들고 노쇠해졌을 때 내보이는 의존성은 어떤 긍정적인 서사도 품기가 어렵다. 그 의존성이 가족과 사회의 생산성을 갉아먹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인의 시간뿐 아니라 노인을 돌보는 사람(주로 여성)의 시간도 의도적 무지의 대상이다. <정동적 평등>에서 논했듯, 사회과학과 정치이론의 사유는 “사회의 돌봄 제도 없이는 연구 대상 중 그 무엇도 기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공적 영역과 삶의 외재적 공간에 집중했다.” 복지를 평생 연구해온 한 학자가 “혈연관계도 아닌데 아내에게 부모님을 맡기는 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내뱉어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의 인식 세계에선 노인의 병든 몸도, 그 노인을 보듬을 ‘모성’을 타고난 여성도 자신의 연구 대상인 ‘문화’ 바깥의 ‘자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슨 W. 무어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문화’와 ‘자연’을 임의로 구분 짓고, 원주민에서 여성에 이르기까지 값싸게 수탈할 수 있는 대상을 ‘자연’으로 외부화시켜온 역사에 불과하다.
이 노인 돌봄의 딜레마를 풀기 위한 해법으로 사회적 책임이 거론된다. 돌봄의 책임을 개인에서 국가와 사회로 이전해야 시민적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제안이지만, 노인의 시간은 여전히 버림의 시간과 동일시된다. 돌봄의 부담에서 벗어나 임금노동이든 활동이든 사회의 생산성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다행일까?
코로나19는 요양원에 갇혀 사회적 죽음 상태에 놓여 있던 노인들을 가장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중이다. 그보다 상황이 나은 노인들 역시 운동이나 종교, 취미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코로나 블루’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치매인 아버지를 오랫동안 돌봐온 내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다. 어머니를 돌보는 시간이 내 일을 포기하는 시간으로 여겨져 한동안 마음앓이를 했다. 지금도 크게 바뀐 건 없지만, 더 나은 상태를 기약하기 힘든 노인을 돌보는 경험이야말로 코로나 이후 세계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감각을 일깨우는 건 아닌지 곱씹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아무리 ‘노오력’해도 미래가 나아질 리 없다는 청년들의 불안과 무력감을 노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의 휘황찬란함을 포기한 시대의 지구 돌봄도 노인 돌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든 노인이든, 죽어가는 생명을 보듬는 시간을 버림의 시간으로 취급해온 오랜 역사에서 우리 다수는 공모자다. 생명 회복의 무모한 기대를 접고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하는 재난 시대에 필요한 역량은 오히려 생기가 아니라 끈기 아닐까. 금세 좋아지리란 기약이 없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노인 돌봄이 일깨운 교훈이자 지구 돌봄에 필요한 윤리다. 현 위기를 ‘경기침체’로 규정하고, ‘뉴딜’을 통해 ‘활력’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코로나 국가에서 아직 낯선 덕목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