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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지옥이 존재하는 두 가지 이유

등록 2020-05-28 17:04수정 2020-05-29 09:28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너무나 유명한 문구다. 나치 강제수용소 입구에 걸려 있던 이 표어는 그 끔찍한 아이러니 때문에 널리 회자됐다. 2020년 한국의 아이러니도 만만찮다. “노동은 신성하다” “직업에 귀천 없다” “사람이 먼저다” 입으로 떠들어대면서도 이 나라는 정작 일하는 사람을 멸시하고 죽게 내버려둔다.

대한민국 노동자는 거의 매일같이 파쇄기에 빨려 들어가 죽고, 프레스기에 끼여 죽고, 불에 타 죽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일종의 연쇄살인 사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사고와 ‘갑질’을 예방하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돈보다 사람 목숨값이 더 싸기 때문이다. 노동자 40명이 숨진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당시 사업주가 받은 처벌은 벌금 2천만원이었다. 한명의 목숨값은 50만원이었다.

고 김용균씨의 원청 사업장인 서부발전은 산업재해로 사람이 사망하면 발전사 정직원은 1.5점, 하청 직원은 1점,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가 숨지면 0.2점을 깎는다는 지침을 갖고 있었다.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의 목숨값은 발전사 정직원의 7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중부발전의 경우 내부 지침 제목부터 ‘신분별 감점계수’라고 적혀 있었다. “본사 직원 사망 시 12점 감점”이고 “하청 직원 사망 시 4점 감점”이다. 최근 5년간 공공기관 발주공사 재해가 가장 많았던 기업은 코레일이었는데, 특히 선로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유독 끊이지 않았다. 2019년 감사원 감사 결과 코레일은 열차접근 경보기를 정규직에게만 지급했음이 밝혀졌다.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소설가 김훈, 지금 이 글을 쓰는 필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위험의 외주화’를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해결책도 이미 나와 있었다. ‘김용균법’ 초안과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이 그것이다. 아니, 실은 헌법과 노동법이 ‘글자 그대로’ 적용되기만 했어도 사람이 지금처럼 많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지경이 됐는가? 우리는 왜 2020년에도 날마다 노동자의 죽음을 보고 전태일의 절규를 소환해야 하는가? 왜 김용균법은 핵심 위험 업종 대부분이 제외된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되고 말았는가? 위험의 외주화 혹은 비용절감 논리는 물론 문제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문제를 ‘발생’시킨 요인과 문제를 ‘지속’시키는 요인은 같지 않다.

“그래도 되니까.” 그렇다. 이 비참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는 이유는 그렇게 사람이 죽어 나가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뭉개고 지나가도, 여당이 선거에 참패하거나 총파업으로 세상이 멈춰 서거나 수백만명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드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노동자를 동정하며 때로 눈물 흘리는 이도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안타깝긴 하지만 능력과 스펙이 부족하니 더럽고 위험한 일을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은 나직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게 노동자의 죽음은 개인의 무능에 불운이 결합된,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처리되었다.

<임계장 이야기>의 저자 조정진씨가 아파트 경비원을 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날 조씨가 입주민이 버린 음식물 잔반통을 씻어내고 있는데 아빠 손을 잡고 그 앞을 지나던 어린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저 경비 아저씨 참 힘들겠네.” 아빠가 대답했다. “응, 많이 힘들 거야.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저리 노골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내심 동조하는 이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존엄의 파괴가 공부 못한 벌칙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비정규 노동자의 처참한 임금이 그들 노동의 적정 가치일 수도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사회에 필요한 노동의 값어치가 고작 그 정도일 리 없기 때문이다.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몸값은 기업과 소비자가 게걸스레 뜯어먹고 남긴 잔해다. 때리고 갑질한 사람만 가해자인 건 아니다. 기업, 시민, 국가 전체가 구조적 불의의 방관자이자 공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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