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여당과 청와대가 주도해 ‘경제개혁’을 뉴딜의 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세워진 후버댐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남동쪽으로 48㎞ 떨어진 콜로라도강의 협곡에 있었다. 댐 높이는 200미터를 넘었고, 길이는 400미터에 육박했다. 댐 위에 14미터 정도 너비로 나 있는 도로를 차량들이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녔다. 사막처럼 황량한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 경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댐의 위용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몇년 전 방문했던 이 댐은 과연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상징할 만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뉴딜 하면 이런 거대한 공공사업을 많이 떠올린다. 하지만 뉴딜은 단기적인 실업자 구제와 경제회복을 위한 대형 개발프로젝트에만 그치지 않는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개혁 작업도 수반됐다. 개혁의 핵심은 1920년대 자유방임 시기 대기업의 독과점화와 월가 금융회사의 탐욕을 제한하고, 다른 한편으론 노동권을 신장하고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뉴딜은 흔히 구제(Relief)·회복(Recovery)·개혁(Reform)의 머리글자를 따 ‘3R’로 불린다. 그 근저에 흐르는 정신은 루스벨트가 처음 ‘뉴딜’이란 단어를 꺼낸 1932년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 잘 녹아 있다. “정부의 정치철학에서 잊힌, 온 나라 보통사람들은 부의 분배에서 더 공평한 기회를 갖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민들에게 뉴딜을 약속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한국판 뉴딜’이 화두로 등장했다. 현재까지 나온 정부의 추진 방향은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이다. 이를 통해 우리 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 일자리까지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정책 방향이 개발(뉴딜식으로 표현하자면 ‘구제’와 ‘회복’) 쪽에만 국한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뉴딜의 이름에 값하려면 사회경제적 개혁이 수반돼야 온전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이는 또한 우리 사회에 누적된 주요한 모순을 치유하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강도 높은 개혁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 외부의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금융을 대가로 이른바 자유방임주의(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요구했다. 그 개혁은 과다 부채에 의존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특징지어진 우리 경제 체질을 개선하는 쓴 약이 된 측면도 있으나, 약자들의 희생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후 20년간 우리 경제는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불평등도가 미국 다음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당시 개혁 추진 주체는 외환위기 직후부터 10년간 정권을 잡은 진보세력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우리 경제는 다시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취업자 감소폭이 102만명(노동사회연구소 추정)에 이르고 소득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경제체제는 언제나 이런 위기 속에서 탄생한다. 미국의 뉴딜과 스웨덴의 복지국가 모델도 대공황 극복 과정에서 나왔다. 지금의 위기는 20년 만에 우리 경제체제를 개혁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다행히도 이번엔 우리 손에 ‘재설계’의 펜대가 쥐어져 있다. 개혁은 이미 기득권 세력의 일부가 된 관료들에게 맡겨놔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결국 당·청(여당과 청와대)이 주도해야 한다. 최근 그린 뉴딜을 한국판 뉴딜의 한 축으로 만든 것처럼 개혁 어젠다를 또다른 축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임기가 2년 남은 정부가 개혁안을 새로 짤 여유는 없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떠 있는 ‘국정과제’ 중 핵심 사안들과 20대 국회에서 야당에 발목 잡혀 통과시키지 못한 개혁법안들에 집중하면 된다.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공정거래법·상법·상생협력법 개정안, 금융 규율을 위한 금융그룹감독제도의 법제화,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고용보험 확대, 소비자 집단소송제 도입,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등이 대표적이다. 서민들의 고통이 심한 주거와 관련해 양질의 공공임대주택 확대, 임대차계약갱신청구권 도입, 종합부동산세법 개정 등도 빠뜨릴 수 없는 과제다.
80여년 전 대공황을 맞은 미국 의회는 루스벨트의 뉴딜에 호응해 산업부흥법(공정경쟁), 글래스-스티걸법(금융개혁), 와그너법(노동권 신장), 사회보장법, 주거법(공공주택 건설) 등 기념비적인 법안들을 통과시켜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노력이 30~40년간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오는 30일 개원하는 21대 국회도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현 경제부 기자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