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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혐오와 이별해야 가능한 것들 / 홍성수

등록 2020-05-21 18:12수정 2020-05-22 11:54

홍성수 ㅣ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사회가 큰 위기에 봉착했을 때 차별과 혐오가 확산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제 불황이 계속되거나,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심화하거나, 가뭄·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불안한 대중심리를 이용하여 희생양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혐오의 전형적인 형태다. 홀로코스트에서의 유대인 등 소수자 학살, 간토(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 해방 이후 좌우 대립 과정에서의 폭력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혐오와 차별의 관점에서도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구촌 곳곳에서 차별과 혐오로 인한 각종 사건 사고가 보고되고 있다. 동양인, 여성, 흑인 등 소수자 집단이 집중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대낮에 이유 없이 욕을 먹거나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남가주 한인 단체들이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을 정도다. ‘아시아·태평양 정책위원회’(A3PCON)에서는 지난 3월부터 코로나와 관련한 미국 내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차별, 폭력 신고를 받아왔는데, 1700건이 넘는 사례가 접수되었다. 대부분 인종을 이유로 한 것이었고 3개 중 1개는 거리와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혐오의 바이러스가 중국인, 신천지, 대구, 성소수자 등으로 이어졌다. 사회심리학자 올포트는 그의 저서 <편견>에서 편견이 유발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자민족중심주의 전통이 있고 다원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으며, 희생양을 만들거나 적개심을 갖는 관습과 전통이 있는 곳에서 편견이 확산하기 쉽고, 편견은 곧 혐오와 차별로 이어지는 계기를 제공한다. 여기에 이질적인 집단이 늘어나고 경쟁과 갈등이 심화하며 급격한 사회변화가 있는 경우라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이론적 가설이지만,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다. 차별과 혐오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한국은 최고 수준의 경고등이 켜진 상황이다.

그런데 실제 한국의 현실은 다소 예상 밖이다. 방역 과정에서의 과도한 개인정보 침해가 지속해서 문제가 되어왔고, 중국, 대구, 신천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문제가 계속 터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잘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혐오에 편승해 경거망동하고 있지 않다는 게 인상적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비난은 적어도 방역의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집단감염이 발생한 특정 집단, 지역, 세대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결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보다 더 힘든 적은 혐오와 차별이라는 적”이라고 경고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배제와 혐오는 감염병과 싸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혐오로 희생양을 만들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작동할 법도 한데, 철저하게 선을 긋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인데도 마음 한쪽이 찜찜하다. 불과 몇달 전만 해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연이은 혐오 발언으로 비난받고 차별과 혐오에 대한 대응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갑자기 180도 바뀌어버린 상황이 당혹스러울 정도다. 태세 전환의 이유는 간단하다. 차별과 혐오가 방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방역을 위해서는 차별과 혐오와 결별해야 함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과제는 이러한 깨달음을 한발 더 진전시키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는 위기의 순간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별과 혐오는 사회 구성원들이 누려야 할 존엄한 삶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적대와 갈등을 유발하여 공동체 자체를 서서히 파괴한다. 그리고 코로나와 같은 어떤 사건과 계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다. 위기가 왔을 때 대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시기에 대비했어야 하는 문제다. 방역당국은 차별과 혐오로 방역이 실패할까봐 연일 노심초사다. 우리 사회가 차별과 혐오에 충분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부담을 훨씬 덜었을 것이다. 만시지탄? 아니다. 앞으로 닥쳐올 위기는 더 크게 찾아올 것이다. 바로 지금이 차별과 혐오에 맞선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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