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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젠더 프리즘] 냉장고 속 여자는 그만 / 이정연

등록 2020-05-17 18:41수정 2020-05-18 15:01

이정연 ㅣ 소통젠더데스크

<한겨레>는 지난해 11월부터 텔레그램 엔(n)번방 성착취의 실태를 전하고 있다. 성착취의 뿌리와 곁가지는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가늠하지 못할 지경이다. <한겨레>는 지난 15일 ‘n번방과 불법도박, 범죄의 공생’ 연재를 시작했다. 성착취 영상을 매개로 수익에 열 올리는 불법도박 산업은 이미 범죄의 체계화를 완성한 공장과 같아 보인다.

연재를 위해 기자들이 탐사보도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건 몇주 전이다. 기사를 공개하기 며칠 전 취재기자들이 쓴 기사가 사내 기사 작성 시스템에 올라왔다. 그 뒤 기사는 사회부 사건팀장과 사회부장의 데스킹(취재기자들이 쓴 기사를 보완하고 손질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때 나 역시 데스킹을 함께 진행한다. <한겨레>의 ‘젠더데스크’가 할 일이다. 젠더데스크는 <한겨레> 구성원과 함께 성범죄나 젠더 이슈 관련 기사를 살피며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콘텐츠를 내놓으려 노력하고 있다.

취재기자가 성착취와 불법도박 공생의 심각성을 ‘사실’대로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기사 여기저기서 읽혔다. 기사를 읽으니 감정이 툭툭 불거졌다. 특히 불법도박 사이트에 내걸린 영상물과 사진들을 자세하게 설명한 부분에선 성범죄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만약, 저 사진과 영상이 내 것이라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동시에 ‘젠더데스크’의 구실이 떠올랐다. 기사에서 성범죄자들이 불법촬영한 신체 부위와 장소를 꼭 드러내야 할까? 기사가 드러낼 것은 성착취 영상이 불법도박의 유인책, 경품이 된 실상 아닌가?

사회부 사건팀장은 나의 문제제기에 “실상은 더 잔혹하다. 범죄의 심각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과 선정적이어선 안 된다는 기준 사이에서 고민이 된다”고 설명했다. 납득이 됐다. 많은 사람이 성범죄가 얼마나 잔혹한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드러낼 것은 두 범죄가 함께 굴러가는 시스템 아닐까?”라는 질문을 사건팀장에게 남겼다. 그 뒤 확인한 기사에는 불법촬영 신체 부위와 장소가 삭제되어 있었다.

<한겨레> 보도 뒤 텔레그램 엔번방 성착취 사건을 다룬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이 여럿 공개됐다. 좋은 기사와 방송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콘텐츠들도 함께 쏟아졌다. 여러 미디어 종사자들이 엔번방과 유사한 온라인 공간에 잠입하고, 그 안에서 본 것을 여과 없이 대중에게 공개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은 독자들을 유인했다. 방송 프로그램은 범죄의 생생한 재연에 몰입했다. 성착취의 실상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범죄를 관음하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를 채워주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콘텐츠들이 스크린을 채운다. 범죄 실상을 전해 대중의 정의감과 공분을 일깨웠으니 문제없는 일일까?

냉장고 속 여자(Women in refrigerators). 디시(DC)코믹스의 만화 <그린랜턴>에서 남자 주인공 카일 레이너는 악당이 여자친구를 살해해 냉장고 속에 넣은 것을 보고 분노의 힘을 각성해 악당을 물리친다. 만화 팬이었던 게일 시몬이 처음 언급한 뒤 ‘냉장고 속 여자’는 남성 캐릭터 힘의 각성을 위해 잔인하게 죽거나 다친 채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를 일컫는다. 만화 속에서 여성을 서사의 주체로 삼지 않고, 소비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용어다.

이제 기사에 ‘냉장고 속 여자’가 있지 않은지 점검하고 질문을 던진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범죄 재연은 대중의 정의감을 정말 일깨우는가. 관음하고자 하는 욕구의 충족 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런 질문을 안은 채 <한겨레>의 기사를 살피는 나는 먼저 독자들에게 사과하고 부탁하려고 한다.

<한겨레>가 다룬 성범죄 관련 기사들이 다른 매체의 기사보다 덜 생생하고, 덜 구체적일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2차 가해의 위험이 있는 선정성 경쟁에는 가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독자들께서도 범죄의 재연보다 성범죄의 구조와 실태를 전하는 데 애쓴 <한겨레>의 기사를 눈여겨봐주세요.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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