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 ㅣ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
이번 21대 국회에서 탈북민 2명이 당선됐다. 정당을 떠나 탈북민이 국회의원이 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같은 탈북민으로서 감사한 일이고 탈북민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두 당선자에게 기대와 우려가 반반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임기 시작도 전에 기대보단 우려가 현실이 됐고 그 피해는 온전히 필자를 비롯한 나머지 3만3500여명의 탈북민들에게 돌아갔다.
정말 잘해주길 기대했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이라는 ‘딱지’를 안고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3만3500여명 탈북민을 대신해서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잘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 ‘공식적인 시험대’에 오르는 것과 같다.
김정은이 20일 동안 보이지 않은 것이 이례적이란 이유로 온갖 소설이 난무했고 태영호(미래통합당)·지성호(미래한국당) 두 당선자의 ‘확신에 찬 분석’은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한국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단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의 무책임한 발언은 고스란히 3만3500여명의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며 쌓아 올린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탈북민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키웠다.
‘빨갱이’, ‘간첩’, ‘극우 꼴통’, ‘도둑놈’, ‘범죄자’ 등 이런 수식어는 금세 두 당선자를 향해 쏟아졌고 더 나아가 “역시 탈북민은 믿을 게 못 돼”라는 일부 국민들에게 있던 기존의 불신을 확신시켜주는 계기로 만들어버렸고 탈북민들에 대한 이미지를 깎아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인정투쟁이고 신뢰투쟁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탈북자라는 이유로 남보다 더 노력해야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탈북자’라는 정체성이 가지는 ‘말’의 힘은 대단히 크다. 특히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면 더욱 그렇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증언하는 모든 ‘개인 스토리’가 북한 전체 모습으로 과대 대표되어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수없이 쏟아지는 가짜뉴스와 유튜브는 북한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 한 사람의 스피커가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탈북민들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지 끊임없이 지적돼왔고 논란도 한두번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지난 2015년에 기고한 바도 있다.(유코리아뉴스 ‘탈북자 증언의 신뢰성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언론의 주목을 받는 탈북민일수록 말과 행동에 절제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 죽었다던 김정은이 비웃듯이 버젓이 걸어서 나타난 것을 보면서도 두 당선자는 여전히 사과보다는 ‘속단하지 말자’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어 참 아쉽다. 그러게 애초에 속단하지 말았어야 했다.
“분석이 다소 빗나간 것이다”, “아직 속단하지 말자”는 안쓰러운 변명 대신 불확실한 정보로 확언을 해서 혼란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는 것이고 앞으로 4년 임기 동안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 사과는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탈북민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태영호 당선자가 4일 늦은 사과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신뢰의 기차는 떠나버렸다. 사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온전히 두 당선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탈북민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 앞으로도 부디 깊이 생각해주며 의정활동을 펼치기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탈북민에게서조차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같은 탈북민으로서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비판을 하는 이유는 정말 탈북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탈북민들이 두 당선자가 앞으로 4년간 이런 일이 더 있을까봐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부디 탈북민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