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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기본소득’ 금기 깬 전국민 재난지원금

등록 2020-04-09 16:33수정 2020-04-10 02:39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제3차 비상경제회의에 참석해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방침을 결정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제3차 비상경제회의에 참석해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방침을 결정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긴급재난지원금의 형평성 논란이 한창 뜨거웠을 때 내게 가장 그럴듯하게 들린 대안은 주진형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의 주장이었다. 주 후보는 1일 기자간담회 때 “18세 이상 성인 모두에게 50만원씩 주자”고 했다. 이는 소득을 잣대로 삼는 데서 생기는 선별의 난점을 풀 수 있고, 성인으로 대상을 제한해 재정 부담도 어느 정도 덜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졌다. ‘사회연대세’를 한시 도입해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1~2%포인트 높이면 된다는 재원 조달 방안도 그럴듯했다.

‘소득 하위 70%를 대상으로 가구당 100만원(4인 기준)씩 지급한다’는 정부안에 견줘 주진형 안이 당시엔 파격으로 보였는데, 일주일 만에 이를 훌쩍 넘어선 쪽으로 정리됐다. ‘매표’ ‘총선용 현금 살포’라고 비난하던 보수 야당에서조차 전체 국민에게 지급하자는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고, 8일에는 청와대·총리실에서도 수용 뜻을 비쳤다.

정부의 선별 방안이 정치권을 거치면서 보편 방식으로 바뀐 것을 선거를 앞둔 사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재난에 가까운 코로나19 파장에 대응해야 한다는 긴급성을 무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코로나 빙자 돈 선거’니 ‘전 국민 갈라 먹기’라는 비판은 한가하게 들렸다. 또 애초 정부 방안에서 비롯될 문제가 너무 많았다. 하위 70%의 기준을 뭘로 삼든 형평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만이 아니다. 주된 잣대로 제시된 건강보험료는 1년(100인 이상 사업장 직장 가입자) 또는 2년 전 소득·재산을 반영한 것이어서 시의성 부족이란 결함을 안고 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고소득층에 지급된 몫은 나중에 세제·세정을 통해 환수하는 게 정상일 텐데, 줬다 뺏는다는 심리적 저항과 아울러 여기서 또 다른 형평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 소득세제를 통해 거둬들이려 할 때 ‘유리 지갑’만 손해라는 불만이 쏟아질 수 있다.

이런 문제점에도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제 쪽으로 한발 나아간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본소득제 도입을 주요 의제로 내건 플랫폼 정당 ‘시대전환’, 아예 기본소득을 이름으로 삼은 당이 출범할 때도 먼 미래의 일, 추상적 구호로 여겼던 기본소득제의 체감도가 확 높아졌다. 시대전환 공동대표를 지낸 이원재 랩2050 대표는 “일종의 금기를 깬 것”이라고 했다.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가 개인에게 현금성 지원을 통해 소득을 채워준 전례가 없다는 점을 일컫는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세나 홍콩, 싱가포르, 대만,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현금성 지원 규모나 흐름으로 보아 재난지원금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코로나 사태로 제일 먼저, 가장 많이 타격을 받는 취약계층의 실상이 기본소득제 도입 주장의 배경과 많이 겹친다는 점이다. 취약계층 중심으로 닥친 경제적 위기는 코로나로 새삼스럽게 생겨난 게 아니라, 이미 겪던 어려움이 코로나 탓에 더 빨리 수면 위로 드러나고 가중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뎌야 할 청년층의 취업 시기가 한참 뒤로 늦춰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여기에 겹친다. 코로나 사태 진정 뒤에도 쉽게 풀 수 없는 난제다.

<21세기 기본소득>을 번역 출간한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은 옮긴이 서문에서 기본소득을 “미래에서 온 도자기 파편”이라고 했다. 고고학자 손에 들어온 도자기 파편이 태고의 비밀을 전하는 정보를 지니고 있듯 기본소득은 ‘우리의 미래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설계돼야 하는지 알려주는 실마리’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일, 노동, 여가, 가족, 사회, 국가의 성격과 본질을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도록 자극하고 유혹한다”.

로봇과 인공지능(AI)의 확산으로 10 대 90의 사회는 1 대 99를 넘어 0.1 대 99.9의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하기 싫다는 게으름의 문제로 실업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전통적인 노동윤리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흐름 속에서 현실로 닥쳐온 재난지원금 지급은 일회용 반창고 붙이기나 일시적 땜질이 아니라 상시적 방파제 구축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자 거대한 실험일 수 있다.

김영배 ㅣ 논설위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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