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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코로나 시대의 공원 / 배정한

등록 2020-03-27 18:32수정 2020-03-28 17:17

배정한 ㅣ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걸어야 도시다. 소파와 하나 되는 주말 오후의 소중한 습관을 깨기로 했다. 몸을 일으키면 걷게 되는 법.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낮 기온이 초여름 못지않았던 지난 주말 광교호수공원에 다녀왔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공원을 걷고 있다니.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원천저수지 산책로를, 희고 검은 마스크를 쓴 인파가 줄지어 걷고 있었다. 무표정한 마스크만 없었다면 전염병에 움츠린 흉흉한 도시의 한 장면이라고 믿기지 않을 봄날 오후 세시의 공원 풍경.

세련된 신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광교호수공원은 섬세한 설계로 이름난 공원이다. 높고 낮은 여러 갈래 산책로가 서로 엮이고 엇갈리며 수변을 따라가는 디자인이 일품인데, 주말 오후의 호숫가에는 이런 디테일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산책자가 많았다. 좁은 집 안에 갇힌 이들, 낯선 재택근무에 당황한 이들, 비자발적 금주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 ‘확 찐 자’라는 냉소적 유행어에 공감하는 이들, 개나리 만발한 봄이 왔으나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로 공원은 여느 해의 안온한 봄보다 북적였다.

이 공원에는 산책자를 환대하는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가 참 많지만, 이날만큼은 빈 의자를 찾기 어려웠다. 갈 곳 없는 노인, 누군가와 함께 있음을 느끼고 싶은 싱글, 사회적 거리를 거부하는 다정한 연인, 기꺼이 사회적 거리를 두는 초로의 부부, 마스크 너머로도 즐거운 표정이 번지는 가족, 교복 대신 후드티로 통일한 청소년 무리, 마음먹고 소풍 나온 외국인 노동자 그룹, 격리와 고립의 시절을 함께 통과하는 우리 모두가 공원 곳곳의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바이러스에 감염된 도시를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공원의 공기는 신선하고 햇빛은 건강할 것이라 믿으며.

여러 신문과 방송이 새롭게 부각된 공원의 존재감을 다루고 있다. 외국 매체들도 다르지 않다. 3월19일자 <뉴욕 타임스>는 “뉴요커가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 공원이 희망이다”라는 기사에서 센트럴파크에 몰린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제목처럼 조금은 호들갑 떠는 어조이긴 하지만,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도시인들이 공원에서 얻는 위안과 안전감이 생생히 전달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상황이 심각한 유럽의 몇몇 도시에서는 공원의 문마저 닫혔지만,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매체들은 2m의 사회적 거리를 지킨다면 공원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위기를 치유하는 공간적 백신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공원은 근대 도시의 산물이다. 19세기의 급속한 산업화가 낳은 도시 인구의 폭증과 과밀, 빈부 격차와 노동자의 여가 문제, 위생 악화와 전염병 유행 등을 치료하는 공간적 해독제로 투입된 게 공원이다. 센트럴파크를 설계한 조경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공원이 열악한 도시 위생을 개선하고 시민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비전을 펼쳤다. 160년이 지난 오늘, 오랫동안 잊혔던 공원의 이 고전적인 효능이 새롭게 재발견되고 있다. 우리는 스마트 도시를 꿈꾸고 있지만, 질병은 여전히 도시와 한 켤레다. 안전과 위로를 찾아 공원으로 탈출하는 코로나 시대의 도시인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도시의 숙명을 반증한다.

재난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신간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에서 위험과 고립을 넘어서는 연결망으로서 공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공원은 위기와 재난을 극복하는 관계와 소통의 장소, 곧 희망의 ‘사회적 인프라’라는 것이다. 광교호수공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처연한 행렬, 그 역설적 풍경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크지만 먼 공원도, 작지만 가까운 공원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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