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수 경제부 산업팀장
편집국에서
지난 5일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북새통을 이뤘다. 넉달째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귀국 시간을 확인하려는 언론사들 문의가 빗발친 것이다. 9일의 ‘자랑스런 삼성인’ 시상식과 사장단 만찬에는 참석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 회장의 귀국시간은 처음엔 6일 새벽, 다음엔 6일 오후, 그 다음엔 7일로 넘어가더니, 결국 9일 이전엔 귀국하지 않는다는 삼성 발표로 상황이 돌변했다. 이미 ‘이번주 안 귀국’ 보도를 낸 언론들의 얼굴은 구겨졌다. 그럼 이 회장 귀국은 언론의 호들갑이 빚어낸 해프닝인가? 그렇지는 않다. 일정이 갑자기 바뀐 것이다. 삼성 임원은 “국내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의 걱정은 공항으로 시위대가 몰려와 험악한 일이 벌어지는, ‘고려대 사태’의 재연일 것이다.
2006년 신년사에서 최고경영자들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 최고기업인 삼성의 총수가 시위대 눈치를 보며 귀국을 미루는 현실은 씁쓸하다. 9일의 사장단 만찬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자랑스런 삼성인 수상자를 축하하는 뜻도 있지만, 이 회장의 64번째 생일 축하 자리기도 하다. 이 회장은 지난해 삼성공화국 논란과 ‘엑스파일’ 사건,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유죄판결, 딸의 자살 등으로 힘든 한 해를 지냈다. 그는 해가 바뀌었지만 귀국도 못하고 외국에서 생일상을 받게 됐다.
〈한겨레〉는 그동안 삼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후진적 지배구조로는 진정한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전체 수출의 22%,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22% 등 한국 경제에서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이 계속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깔려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도 삼성 문제를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와 세습경영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삼성은 이를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그런 오만과 안이함이 지금의 곤란을 자초했다면 지나칠까. 삼성 문제는 더는 방치하기 어렵고, 그 해결의 몫은 이 회장에게 있다. 그의 귀국이 기다려지는 것은 삼성 해법 제시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삼성 구조본의 고위임원도 지난해 말 사석에서 “이재용씨가 국민의 축복을 받으며 경영권을 승계했으면 좋겠다”며 “(삼성 해법을) 무한정 끌 수는 없다”고 털어놨다.
삼성 해법의 출발점은 ‘세금 없는 대물림’과 지배구조 논란에 대한 삼성의 ‘결자해지’다. 이재용씨가 에버랜드, 삼성에스디에스, 삼성전자, 서울이동통신의 전환사채 등을 헐값에 사들여 얻은 이익을 공익사업에 자발적으로 출연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만하다. 금산법 논란에서 나타났듯 고객돈을 활용해 총수의 지배를 유지하는 ‘산업자본에 의한 금융지배’ 문제도 개선해야 한다. 이런 삼성 해법은 이건희 회장 퇴진론이나 삼성 해체론과는 궤를 달리한다. 삼성 해법은 궁극적으로 삼성한테 이롭고, 한국사회에도 이로운 ‘상생’의 접근이어야 한다. 소수 비판론자들만 침묵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삼성 내 일부 인식이 비이성적이듯, 현실적으로 한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존재하는 삼성에 대한 부정도 비현실적이다.
지난해 작고한 ‘현대 경영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글로벌 시대 경영자의 핵심 구실을 ‘어떻게 변화를 주도하고 미래를 창조할 것인가’로 요약했다. 위대한 리더는 조직에게 필요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이미 삼성의 변화를 이끌어낸 경험이 있다. 1993년의 ‘신경영’ 선언이 그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삼성의 토대가 됐다. 10여년 전 해냈듯이, 삼성이 다시금 변화와 혁신을 통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곽정수/경제부 산업팀장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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