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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준만 칼럼] 재난은 가난을 차별한다

등록 2020-03-22 18:17수정 2020-03-23 09:25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16일 <한겨레> 이재훈 기자가 쓴 ‘코로나 집단감염, 지금 여기의 책임윤리’라는 제목의 칼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코로나19가 확산하는 동안 크게 세차례 집단감염 사례가 있었다며,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가난’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지요. 재난은 빈부격차를 초월해 모든 사람을 덮치기에 우리 모두 ‘공동체적 일체감’과 더불어 ‘희망과 관용과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렁 속에서도 별은 보인다’(2일치 칼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만,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하인 머레이는 재난이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영원한 허상을 버려라. 그리고 재난은 모든 걸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쓸어간다는 생각도 버려라. 전염병은 쫓겨나서 위험 속에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을 집중 공격한다.”

캐나다 작가 나오미 클라인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얼마 전만 해도 재난은 사회적 단합이 일어나는 시기로 여겨졌다. 즉, 하나로 뭉친 지역사회가 구역을 따지지 않고 합심하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그러나 재난은 점차 정반대로 변하면서 계층이 나뉘어 있는 끔찍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경쟁과 돈으로 생존을 사는 세상 말이다.”

코로나19 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 ‘거리’가 없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치명타를 가합니다. 요즘 택시를 타길 꺼립니다만, 택시를 타보시면 실감할 겁니다. 영세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정도 비슷합니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그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온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이지요.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을 접하기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재산과 소득 수준에 따른 ‘주거지 분리’가 가장 큰 이유이지요. 이런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고민은 이른바 ‘소셜믹스’ 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겐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를 한 단지에 섞어 짓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만, 소셜믹스엔 다양한 방법이 있지요.

그런데 이게 영 쉽지 않습니다. ‘주거 소셜믹스’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임대 아파트를 차별하는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지요. 최근 <한겨레21>이 서울에 300가구 이상 공급된 공공임대아파트 158개 단지와 서울시 616개 초등학교 통학구역을 한달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임대아파트 아이들에게 쏟아진 차별과 혐오의 시선, 분리와 배제의 시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국에 걸쳐 일어나는 이런 차별·혐오·분리·배제는 사실 ‘재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상의 재난이지요. 박영희 시인은 3년간 가난의 현장을 취재한 끝에 출간한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한 발을 빼려 하면 다른 발이 빠져들고 다른 발을 빼려 하면 또 다른 발이 빠져드는 수렁에 빠져 헤매는 이웃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선거 중심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선거 제도 자체가 가난을 차별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은 투표를 할 시간조차 없지요. 그들의 목소리는 선거판에서 들리지 않습니다. 애써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 제도가 있다곤 합니다만, 그들은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가난하냐’ 죽고 싶을 만큼 묻고 또 묻고는… 죽지 않을 만큼 줘요.” “사실 그렇게 수치스러워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너무 섭섭해서 지워지지 않아요. 일을 할 수 있는데 놀고먹으려는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누가 기초수급자라고 주변에 말하겠어요. 담당하는 공무원도 무시하는데 일반인들은 속으로 얼마나 더 무시를 하겠어요. 수급자가 아닌 척하고 다니는데 되게 피곤해요. 어려운 사람 아닌 척하는 것이….”(<경향신문>, 2019년 4월1일치)

코로나19와 4·15 총선은 이런 일상의 재난을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코로나19를 두고 정파적 전쟁을 벌이는 것도 자제하면 좋겠습니다. 정파성을 피할 수 없다면, ‘가난과의 전쟁’을 위한 현명한 정책을 내놓는 경쟁을 하면 좋겠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의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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