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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카뮈, 페스트, 재난의 정치화 / 백기철

등록 2020-03-15 19:46수정 2020-03-16 02:06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돌림병에 대응하는 다양한 군상이 등장한다. 봉쇄된 도시를 탈출하려는 도피형, 하늘의 뜻이라며 물러서는 체념형, 보건대를 조직해 구제에 나서는 저항형 등 제각각이다. 1940년대 후반 출간된 이 책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프랑스 지식인들은 비교적 냉담했다. 이유는 소설의 정치적 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표적 지성이었던 장폴 사르트르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카뮈가 전염병을 자연적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그렸을 뿐 역사적, 정치적 자리매김을 하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쉽게 말해 어느 당에도 책임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누구보다 훌륭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카뮈에게 전후에도 그에 걸맞은 정치적 선명성을 기대했지만 작품은 사뭇 달랐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어디에도 역병 사태의 책임을 부여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밀도있게 그려냈을 뿐이다. 냉전 시대 프랑스 지식인들이 혁명, 진보, 투쟁 등 거대한 역사에 뛰어들던 때 카뮈는 점점 다른 길로 갔다. 급기야 <반항하는 인간>을 통해 집단수용소 등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맹공하고, ‘객관적 진리’의 허구성을 설파하기에 이르렀다.(<지식인의 책임>, 토니 주트)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하는 와중에 선거까지 겹치면서 ‘재난의 정치화’가 극에 달하고 있다. 재난 상황도 심각하지만 이를 두고 정치적 공방을 주고받는 것 역시 재난스럽기까지 하다. 재난의 정치화는 박근혜 정부가 촉발한 측면이 있다. 세월호, 메르스 사태 때 못난 정권의 못난 대처가 국가에 엄중한 책임을 묻도록 했다. 하지만 재난이 정치적으로 과잉 해석되고 소비되는 것 역시 소모적이다.

카뮈는 <페스트> <이방인> 등이 국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지만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선 비주류였다. 40대 후반 자동차 사고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한나 아렌트는 나중에 그런 카뮈가 당시 파리에서 가장 빼어난 지식인이었다고 평했다. 그의 세대가 모두 정치에 휩쓸렸던 때에 카뮈만큼은 언제나 자기를 당기는 그 힘에 대항했다고 했다. 재난에 대한 정치적 무잣대, 무개념도 문제지만 극도의 정치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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