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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마다가스카르 계획 / 김영준

등록 2020-03-13 18:20수정 2020-03-14 16:10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지난해 12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전에 없이 강경하고 솔직한 말투로 어느 폴란드인을 비난했다. 2차대전 직전 주독일 폴란드대사 립스키. 그는 “반유대주의 쓰레기”로,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아프리카로 보내겠다고 하자, 감격하여 바르샤바에 그를 칭송하는 기념물을 세우겠다고 한 자”이다. 푸틴의 요지는 명확하다. ‘폴란드는 그리 착한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2차대전의 기원을 독소 불가침조약에서 찾는 서방의 시각과, 이미 서방의 일원으로 행동하는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누적된 불쾌감이 드러나 있다. 푸틴의 발언에 격분한 폴란드는 4쪽짜리 성명까지 발표했다. 강대국들이 시험하듯이 주변국에 툭툭 잽을 날리는 광경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문제보다도, 푸틴의 재료가 된 독일의 유대인 이송 계획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 히틀러는 립스키와 환담 중 아이디어를 꺼낸 듯하다. 그러나 이 계획이 행정 문서로 나타나는 것은 개전 뒤이다. 1940년 독일 외무부의 ‘유대인 문제’ 담당 관료 라데마허는 이런 메모를 나치 수뇌부에 전달했다. “유대인 문제의 해결은 유럽 내 모든 유대인을 타지로 몰아내는 것이다. 그 후보지로 마다가스카르를 제안한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섬이다. “매년 유대인 100만명을 이쪽으로 보낸다. 친위대가 이들을 통치한다.” 이 계획은 당연히 히틀러의 마음에 들었다. 사실 총통은 젊은 시절 이와 비슷한 주장을 삼류 과격 출판물에서 접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친위대의 아이히만도 찬동했다. 단지 문제는 마다가스카르가 멀다는 것이었다.

북해만 열린 국가 독일이 유대인을 해마다 100만명씩 아프리카로 실어 나를 수 있는가는 매우 현실적인 난관이었다. 보급도 문제였다. 낯선 기후의 불모지에서 부실한 보급으로 유대인들 상당수가 사망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사망률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시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독일 관료 기구가 움직이고,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매우 진지하게 입안되었다.

가장 큰 장애는 영국의 해군력을 뚫고 안정적으로 배를 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립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 어려움을 직감했기 때문에 그런 입에 발린 소리도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아무튼 실행은 계속 연기되었다. 1942년 마다가스카르가 영국 손에 떨어졌다. 계획은 무산되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방법’ 중 ‘이송한다’가 사라진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공연한 헛발질, 2년간의 행정력의 낭비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 성과는 심리적이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나치 권력 집단들 사이의 경쟁에 주목한 사람인데, 그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최종 해결(가스실)로 가는 중요한 심리적 준비 단계’였다고 지적한다. 마다가스카르는 본심을 숨기고 대중을 미혹하기 위한 트릭, 요즘 말로 ‘애드벌룬’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계획 자체가 비밀이었고 나치 수뇌부와 관료들은 이를 진지하게 믿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들은 ‘이제 남은 해결책’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마치 아이를 숨겨놓는 게 예상외로 성가신 일이라는 걸 깨달은 유괴범이, ‘조용하게 만드는 데’ 망설임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권력 집단 역시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심연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다. 간혹 계획이 좌절될 때, 문득 정신 차리고 뒤돌아설 수 있을까. 그보다는 더 끔찍한 다음 단계로 질주하는 것이 보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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