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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점성술과 인플루엔자·코로나바이러스 / 조일준

등록 2020-03-11 18:28수정 2020-03-12 02:16

‘바이러스(virus)’는 라틴어로 ‘독’, ‘즙’이라는 뜻이다. 이 낱말을 오늘날 바이러스에 해당하는 병원균을 가리키는 용어로 처음 명명한 사람은 19세기 네덜란드 미생물학자 마르티누스 베이에링크였다. 그가 바이러스를 실제로 본 건 아니었다. 뭔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가 분명히 있으며 그 형태는 액성일 것이란 추측만 했을 뿐이다. 바이러스는 당시 최고의 광학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기껏해야 수백 나노미터(1㎚=10억 분의 1m)로, 단세포 병원균인 박테리아의 100분의 1 크기다. 전자현미경으로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독기였다.

바이러스는 유전정보를 저장한 핵산(DNA 또는 RNA)과 그 외피인 단백질막, 두 가지로만 구성된 극히 단순한 생명물질이다. 세포가 아닌 데다 생명체의 물질대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무생물인데, 다른 세포(숙주)에 기생해 자기복제를 한다는 점에선 생명체의 특성을 갖는 특이한 존재다. 바이러스는 구조가 단순한 탓에 변신의 귀재다. 인간은 돌연변이 바이러스 앞에 속수무책이다.

과학혁명 이전의 옛사람들은 바이러스가 유발하는 재앙적인 감염병을 하늘이 내리는 징후 또는 징벌로 생각했다. 중세 유럽에선 고대 의학이 천문학과 점성술에 포섭됐다. 점성술은 천문 현상이 땅과 인간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원인과 의미를 설명하려던 당대의 안간힘이었다. 그중 한 분야가 ‘메디컬 점성술’이다. 14세기 페스트(흑사병)가 창궐해 유럽 인구 30~60%(추산)가 숨졌을 때에도, 정통파 신학의 수호신 격이었던 프랑스 파리대학은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페스트 발생의 원인을 하늘의 영향에서 찾았다.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아형 H1N1의 모습. 19세기초 유럽에서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의 병원균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아형 H1N1의 모습. 19세기초 유럽에서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의 병원균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행성 독감에 ‘인플루엔자(플루)’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감염병에 대한 당대의 시각과 지식수준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어로 ‘인플루엔차’(influenza)는 ‘영향’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인플루언스’(influence)’다. 평범한 보통명사가 특정 유형의 독감 또는 그 병원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진 사례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A, B, C, D 네 종류로 나뉜다. 이 중 돼지와 소를 숙주로 삼는 ‘D’를 뺀 앞의 세 가지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숙주를 가리지 않는 인수공통 병원체이다. 겨울철이면 한 번씩 유행하는 A형(또는 B형, C형) 독감의 주범이다.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는 코로나바이러스도 다양한 돌연변이로 인류를 위협한다. 에볼라, 메르스, 사스, 코로나19는 모두 그 변형들이다. 생김새와 명칭이 천문 현상과 관련이 깊은 것도 흥미롭다. 영어 단어 ‘코로나’(corona)는 해가 달에 가리는 일식 때 테두리에 반지처럼 빛살만 보이는 ‘광환’을 가리킨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겉면에 튀어나온 돌기들이 숙주세포의 수용체와 열쇠-자물쇠처럼 맞아떨어져 결합할 때에만 세포 안으로 침투할 수 있다. 그렇게 병원체가 남의 몸 안에 들어가 증식하는 과정을 감염이라고 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2019년형 돌연변이종인 코로나19의 입체 모형도. 위키미디어 코먼스
코로나바이러스의 2019년형 돌연변이종인 코로나19의 입체 모형도. 위키미디어 코먼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한 지 두 달이 되도록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선포에 몹시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팬데믹이 ‘패닉(극심한 공포)’을 확인하고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팬데믹 수위를 오르내리는 신종 바이러스 감염병의 대부분은 인간과 친하지 않은 야생동물에서 비롯한다.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한 막개발이 자연계의 균형과 질서를 깨뜨린 대가라는 게 보건·환경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 ‘달 아래’ 세계의 만물은 흙, 물, 공기, 불 등 4원소로 구성돼 있으며, 끊임없이 생성·변화·소멸을 반복한다. 반면 달 위의 천상계는 영겁불변의 가상의 제5원소 ‘에테르’로 충만하다고 봤다. 제5원소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퀸트에센스’(quintessence)는 라틴어 ‘퀸트’(quint, 다섯번째)와 ‘에센티아’(essentia, 본질)의 합성어로, ‘가장 순수한 본질(정수)’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뤼크 베송 감독의 영화 <제5원소>에서 주인공들이 외계 침입자들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그토록 찾았던 제5원소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첨단의학 시대, 코로나19가 드러낸 진정한 두려움은 팬데믹 현상보다 패닉이 주는 ‘독기 어린 영향’이 아닐까. 말뜻 그대로 진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다.

※참고 도서= <점성술로 되짚어보는 세계사><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바이러스 폭풍의 시대>

조일준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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