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시티 127 신곡 '영웅' 뮤직비디오 장면 갈무리
‘엔시티 127’(NCT 127)이 신곡 ‘영웅'을 발표했다. 이소룡(리샤오룽)을 테마로 삼은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흔히 말하는 동양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이소룡의 상징적인 노란색이 곳곳에 사용되고 용 조각상이 장식된 장지문, 동양의 초현대 도시, 무술 동작을 연상시키는 안무 등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 그룹은 2018년 <레귤러-이레귤러> 앨범에서도 사이버펑크풍의 서울을 묘사한 바 있다.
드물지만 충분히 인상적으로, 케이팝 세계에 ‘동양풍’이 활용되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아이돌’에 사자춤을 등장시키고 “얼쑤” 같은 여음구를 가사에 녹인 바 있다. 빅스는 ‘도원경’의 무대에 신선의 이미지를 내세웠고, 오마이걸의 ‘데스티니’ 무대는 전통풍 의상에 승무를 연상시키는 흰 천을 소품으로 사용했다.
누군가는 한류의 근원으로서 전통문화의 힘과 매력을 말하고자 할 수 있다. 실제로 방탄소년단에게는 그러한 해석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이 작품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마이걸과 빅스는 의상이나 노래의 정서 모두 전통미보다는 차라리 시대극 배경의 판타지 소설에 가까워 보인다. 통칭 ‘퓨전 사극’에 익숙한 21세기 동 세대 대중을 겨냥한 미감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반면 방탄소년단과 엔시티 127은 좀 더 국외를 의식한 인상을 준다. ‘아이돌’의 가사가 단순한 정의에 국한되지 않는 혼종적 정체성을 말할 때 한껏 ‘키치적’으로 표현된 동양적 요소들은 비틀린 유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영웅’ 역시 이소룡이 미국 흑인 대중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한 기호인 점, 스타일에 있어 이소룡보다는 그 영향을 받은 영화 <킬 빌>을 더 연상시킨다는 점, 20세기식 사이버펑크를 결합하는 점 등에서 묘한 기색을 보인다. 이런 콘텐츠가 전통의 힘이라 결론 내린다면 기마민족에서 비롯된 말춤이 싸이의 성공 비결이라는 식의 납작한 주장이 되기 쉽다.
‘동양풍’은 케이팝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시작되고 움직이는 곳에 대한 서구의 호기심에 응답한다. 한편으로, 대중음악의 변방으로서 한국이 영미 음악을 뒤쫓던 과거를 지나 세계 시장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 혹은 좇아야 할 대상이 사라지면서 찾아낸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겠다. ‘동양풍’은 영미 문화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미감을 선보인다. 또한 제1세계에 의해 ‘전용’되지 않고 동양인이 주체적으로 그 매력을 드러내며 환상을 자극한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셀프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화적 전용은 단지 어떤 문화적 요소에 대한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문화를 폄하하는 것만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신비화하는 방식으로도 작동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셀프 오리엔탈리즘’이라 한들 물신적인 취향이나 편견을 강화할 위험을 내포하기는 마찬가지다. ‘주체적’이란 대목 역시 타자화의 시선을 내면화해 이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마주할 수도 있겠다.
거론된 몇 작품은 이미 우려의 목소리를 들은 바도 있다. 그럼에도 이 까다로운 줄타기를 해내며 만들어낸 준수한 결과물들이라 할 만하다. 세계의 관심을 받는 케이팝이라는 전인미답의 상황에서 시행착오가 쏟아지기보다 과감하지만 진중한 걸음이 이어지는 점은 고무적이다. 동양적 요소를 활용한 섬세하고 참신한 기획을 앞으로도 자주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 셀프 오리엔탈리즘의 위험성을 망각하거나, 케이팝에 수시로 끼어드는 국가주의적 자부심이 이런 경향과 함부로 맞물리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길 바라본다.
미묘 ㅣ <아이돌로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