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최근 가장 놀라웠던 글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푹 쉰 후 슬슬 재난학교를 만들자’였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한 석 달 정도는 푹 쉬자”고 한 뒤, 기본소득, 봉준호, 포스트휴먼 등을 현란하게 오가다가 “서울에 재난학교를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저 글이 경이로운 이유는 표층 수준에서 온갖 진보적 개념을 남발하며 사회적 연대를 말하지만 심층 수준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를, 즉 각자도생을 가리킨다는 점에 있다. “어수선한 석 달 정도는 푹 쉬자”라는 말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에 석 달간 푹 쉬어도 지장 없는 이가 몇이나 될까? 누군가에게 푹 쉴 수 있는 석 달이 누군가에겐 벼랑 끝에 매달린 석 달이다. 쉬고 싶어도 못 쉬는 자영업자들, 코로나19로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애초 저 글의 독자로 상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재난학교를 슬슬” 만들어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자는 말 역시 지독한 서울중심주의 또는 ‘변방’에 대한 무관심을 방증할 따름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 먹고살 만한 사람들의 진보’다. 생각해보면 저런 사고방식은 만연해 있었다. ‘조국 전 장관 수호’를 위한 촛불 시위도 이를 염두에 두면 많은 부분 해명된다. 대리시험, 표창장 위조, 공직자 사모펀드 같은 불법적·비도덕적 행위가 이미 그들끼리의 일상이기에 용인해준 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사생활’이 검찰개혁이나 수구 척결 같은 ‘진보적 과제’와 무관하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런 행태를 “위선”이라 비난한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위선은 글자 그대로 선을 위장한다는 것이며 스스로 옳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연 저들이 그런가? 되레 저들은 자신만이 ‘진짜 진보’라 확신하지 않을까. 조기숙 교수는 언젠가 “신좌파”를 자임한 바 있고 조국 전 장관은 심지어 “사회주의자”라 당당히 선언하지 않았던가. 앞의 칼럼은 소셜미디어 등에서 회자된 이후 인터넷판에서 수정되었는데, 평소 지론에 비춰보면 저 글이 아마 필자의 진심일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참과 거짓 내지 진보와 보수 같은 개념으로 풀어낼 수 없다. 이것은 이념이라기보다 사랑, 정확히는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사랑에 빠진다. 나르시스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narcosis)에서 파생한 말로 감각 마비, 혼수상태를 뜻한다. 숲의 요정 에코가 나르시스의 목소리를 메아리로 만들어 그의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지각이 마비된 나르시스는 자기 모습에 자폐적으로 몰두하며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찰스 테일러가 ‘자기 진실성의 시대’라 부르고 이졸데 카림이 ‘2세대 개인주의’라 명명한 사회적 경향은 모두 이러한 나르시시즘과 밀접히 관련된다. 196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는 다양한 개인들이 민족이나 계급 같은 집단적 범주가 아닌 개인의 정체성을 통해 정상성을 인정받으려는 싸움을 벌였고, 그것이 오늘날 정치적 주체의 보편 양식 중 하나가 됐다. ‘말이 통하는’ 상대들끼리 만나다 보니 결과적으로 중간계급의 정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자기 진실성의 추구는 용의주도한 계급전략이라기보다 ‘정의로운 능력자’가 되려는 자기애적 열망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의 정치는 늘 동일성과 정상성을 향한 투쟁이 된다. 이 정치에는 논리적으로 ‘타자’가 존재할 수 없다. 타자가 미약하고 추레한 존재일 때, 나르시시스트들은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반면 타자가 강하고 세련된 존재일 때 그들은 이미 타자가 아니라 동일시의 대상이 된다.
나르시시즘으로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감각 마비 때문에 나르시스가 자신을 타인으로 착각하듯, 나르시시즘 정치는 인터넷에 활발히 의견을 개진할 지식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주장을 ‘우리 시대 가장 절박한 요구’로 오인하게 만든다. 코로나19 경제 대책으로 나온 ‘착한 건물주’ 세금 감면 정책은 이런 나르시시즘 정치의 적나라한 사례다. 헬기로 돈을 뿌려서라도 빈곤 취약계층을 도와야 할 이 시기에 정부는 세금으로 건물주를 지원하고, 시민들은 잘한다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 혼수상태의 사랑과 어찌 이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