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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도시에 그린 백신, 런던 콜레라 지도 / 배정한

등록 2020-02-28 18:06수정 2020-02-29 15:03

배정한 l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콜레라는 도시의 성장과 함께 자라났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나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그리듯,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덮친 콜레라는 중세의 페스트 못지않게 치명적이었다. 영국에서는 1831년에 콜레라가 처음 창궐해 5만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시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었지만 생존과 직결되는 위생 기반이 열악했던 시대, 인구 250만 런던의 템스강이 분뇨와 쓰레기로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1854년 여름의 끝자락,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의 빈민가 소호에 다시 콜레라가 돌았다. 하루 만에 70명이 목숨을 잃었고, 열흘 뒤엔 500명을 넘어섰다. 특히 브로드가에서는 열명 중 한명꼴로 환자가 나왔다.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번지던 ‘청소부들의 도시’ 런던에서도 이례적인 속도였다.

콜레라가 세균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콜레라의 원인이 유독한 공기와 심한 악취라고 맹신했다. 대부분의 의사가 이 ‘독기설’을 지지했으며 저명 의료인 나이팅게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이성적인 독기설에 의문을 품고 감염원을 물에서 찾아온 한 의사가 재앙이 번지고 있는 소호에 뛰어들었다. 마취의 존 스노는 환자와 사망자가 나온 집을 마치 탐정처럼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사하고 위치를 지도에 기록했다.

며칠 만에 발병의 공간적 패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비극의 진원지는 브로드가의 한 식수 펌프였다. 아무 데나 쏟아낸 배설물이 상수원으로 흘러 들어간 것. 사망자의 절대다수가 펌프 주변의 거주자다. 꽤 떨어진 곳의 감염자는 물맛 좋다고 이름난 이 펌프에서 물을 길어 먹던 사람들이다. 지나다 물을 마신 상인도 사망했고, 이 물을 쓴 커피숍 손님들도 희생양이 됐다. 펌프에서 가깝지만 지도 위가 하얀 곳은 양조장 부근. 물 대신 맥주를 마신 덕분이다. 이 놀라운 발견을 바탕으로 스노는 지역 이사회를 설득해 창궐 열흘째 날 문제의 펌프를 폐쇄했고, 마침내 콜레라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런던 콜레라 지도
런던 콜레라 지도

콜레라가 수인성전염병임을 입증하기 위해 스노는 사망자 주거지와 펌프의 관계를 명료하게 시각화한 지도를 다시 작성했다. 간결한 바탕선 위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과 원형 점, 줄표로 구성된 스노의 지도는 질병과 공간 데이터의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도 데이터 시각화의 고전으로 재해석되곤 하는 이 지도는 빅데이터와 첨단 기법을 갖춘 현대 역학의 토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달을 훌쩍 넘긴 코로나 위기 앞에서 160년이 넘은 런던 이야기가 계속 떠올랐다. 런던 콜레라 지도의 탄생 과정을 재구성한 <감염지도>(2008, 김영사)의 저자 스티븐 존슨은, 지도의 ‘조감하는 시선’이 중요한 건 1854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며 미래에 엄청난 전염병이 닥친다면 지도가 백신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콜레라 박테리아와 다르게 21세기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도시 한 동네의 문제가 아니다. 질병은 시공간적으로 촘촘히 연결된 도시들의 네트워크를 이동한다. 그러나 불과 며칠 사이에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바이러스 자체보다는 불안과 공포, 비난과 불신이 우리 사회를 감염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스노가 발로 뛰며 손으로 그려 만든 지도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감염자의 위치와 이동 경로 지도는 타자를 배척하거나 혐오하는 데 필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를 조감하는 태도와 정확한 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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