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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네 죄를 네가 알렷다?! / 김재섭

등록 2020-02-25 18:42수정 2020-02-26 02:08

김재섭 ㅣ 산업팀 선임기자

‘부당하다’는 ‘이치에 맞지 아니하다’(표준국어대사전)란 뜻을 갖고 있다. 비슷한 말로는 ‘못마땅하다’와 ‘마땅찮다’ 등이 있다. 누구의 말이나 행위가 못마땅할 때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법 집행자가 누군가의 행위를 불법으로 판단해 처벌하는 잣대로 이 표현을 쓰면 어떨까. 판단과 처벌 내용이 시시각각 달라지지 않을까.

가정이 아니다. 이런 법안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매크로 금지법’으로도 불리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망법) 일부개정안’이다. 이 법안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미래통합당 간사 김성태 의원(비례대표)이 2018년 4월 ‘드루킹’ 사건을 계기로 삼아 발의했다. 올해 초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이 ‘데이터 3법’ 국회 통과 협조 조건으로 이 법안 처리도 합의해, 지난 17일 개막한 20대 국회 마지막 임시회의에서 통과가 확실시되고 있다.

당시 합의된 망법 개정안(합의안) ‘제3조의2(정보통신서비스 신뢰 증진을 위한 책무)’는 “이용자는 부당한 목적으로 단순·반복적 작업을 자동화하여 처리하는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서비스를 조작해서는 아니되며, 일정 규모 이상의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해당 서비스가 이용자로부터 조작되지 않도록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어기면 최대 징역 3년 혹은 3천만원 이하 벌금 처벌을 받도록 했다.

법안에 명시된 단순·반복적 작업을 자동화해 처리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매크로’다. 이 기능은 수강신청, 명절 기차표 예매, 공연 티켓 구매 등 누리꾼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활용되고 있다. 음원 사이트와 온라인쇼핑몰 등의 ‘선착순 한정 특가’ 이벤트 참여 때도 애용된다.

망법 개정안은 이 가운데 ‘부당한 목적’으로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행위를 골라 금지시키는 게 골자다. 그런데 어떤 경우가 부당한 목적에 해당되는지를 가리는 기준이 법안에 없다. 시행령에 위임하지도 않았다. 국어사전 뜻풀이대로라면, 매크로 기능 활용 행위가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를 처벌하는 것도 가능하다. 참고로 매크로 프로그램 불법 사용은 업무방해와 개인정보 침해 등으로 현행법으로도 이미 처벌 가능하다.

이에 법적 실효성도 없이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만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누리꾼이 ‘부당한 목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자기검열에 나설 수 있다. 정보통신서비스 사업자는 혹시 모를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누리꾼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명확한 근거도 없이 게시물 차단과 이용자 접속 차단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네이버가 이번 4·15 총선 기간에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 등의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기로 했는데, 업계에선 “미리 몸 사리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높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성명을 내어 “표현의 자유 위협하는 망법 개정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규제개혁당은 “위헌”이라고 꼬집었다.

전례가 있다. 1990년대에 전기통신사업법 53조 ‘불온 통신’ 조항을 두고 지금과 유사한 논란이 벌어졌다. ‘불순하다’는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불온의 의미가 추상적인데다 명확한 기준도 달려 있지 않다 보니 법 집행자의 자의적 적용이 많았다. 경찰·안기부(현재 국가정보원)가 이 조항을 근거로 하이텔·천리안 등에서 활동하는 학생·노동운동 단체들의 비공개 온라인대화방(CUG)에 ‘불온’ 딱지를 붙여 차단시키는 사례가 잦았다. 10년 가까운 공방 끝에 2002년 위헌심판을 받아 ‘불법통신’으로 대체되고, 불법 판단 기준도 마련됐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면, 20대 국회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될 텐데, 합의안대로라면 ‘부당한 목적’의 법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물론 사업자들을 불러 “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 식의 호통을 치기엔 안성맞춤이다.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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