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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후천개벽 / 고명섭

등록 2020-02-18 17:04수정 2020-02-19 02:39

고명섭 ㅣ 논설위원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한 이 말은 현대 페미니즘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명제로 꼽힌다. 이 명제는 여성이라는 성을 생물학적 성(섹스)과 사회문화적 성(젠더)으로 나누어 볼 것을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사회문화적 성이 생물학적 성보다 더 본질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동성애자로서 페미니즘 이론가가 된 주디스 버틀러는 이 주장을 한번 더 밀고 나가 생물학적 성 자체가 후천적으로 산출된다고 주장했다.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생물학적 성이 의학적으로, 사회적으로 판단되고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바꾸는 트랜스젠더의 사례를 통해 버틀러의 주장은 명백한 근거를 획득했다.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여성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통스러운 결단을 통해 여성이 된 사람이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트랜스젠더 여성이야말로 가장 여성적인 여성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여성이 남성의 상징을 지니고 살아온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대학이라는 공동체의 페미니스트 구성원들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소수자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페미니즘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 운동의 슬로건이었다.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 저지는 이 슬로건에 역행해 소수자 해방이라는 페미니즘의 대의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저버린 일이다. 돌이켜 보면 이런 페미니즘의 자기 배반은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에서 낯설지 않다. 백인 남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 주류 백인 여성들이 실천한 페미니즘이 그런 경우다. 주류 백인 여성들은 흑인·하층 여성들을 기존의 인종주의·계급주의 틀 안에서 대상화하고 차별하는 것을 문제로 삼지 않았다.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가 백인 중심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간명한 정식을 제시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훅스가 말하는 모든 사람은 인종과 계급을 넘어 모든 종류의 여성, 모든 종류의 소수자, 나아가 모든 종류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훅스의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입각한 모든 형태의 배제와 착취를 거부하는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의 대의는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의 해방을 통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이며, 바로 이런 보편적 대의 덕분에 페미니즘은 오늘날 주도적 해방운동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세상은 우리 근대 민족종교들이 주창했던 후천개벽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음양론이라는 형이상학을 바탕에 깔고 있는 후천개벽 사상은 양이 극단적으로 우세한 선천시대를 끝내고 음이 해방되는 새 세상의 도래를 개벽이라고 명명한다. 후천개벽 시대는 가부장제의 권력질서가 해체돼 음과 양 사이에 진정한 평등이 성취되는 시대다. 단순히 음이 양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으로 대표되는 소수자성이 차별과 배제와 억압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음양 공존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 후천개벽이다.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그 트랜스젠더 여성은 성숙하게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일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항상 소수자인 것은 아니다.” 그 여성은 소수자가 다수자가 될 수도 있으며 다수자로서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음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자신을 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약자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을 늘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강자일 수도 있음을 잊고 다른 약자를 무시한다.” 이 여성의 논법을 빌리면 후천개벽이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다수자성을 자각하고 극복해 소수자로서 연대하는 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수자 되기의 실천은 모든 해방운동의 필요조건이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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