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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내 친구 박한희 / 김지혜

등록 2020-02-17 18:44수정 2020-02-18 02:13

김지혜 ㅣ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

‘박한희’가 한 포털사이트 실검 1위에 올랐다. ‘이 정도로 유명한 거였어?’라고 농을 하며 관련 기사를 보았다. 한 여자대학 법과대학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 ㄱ씨가 박한희 변호사를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로서 롤모델로 지목한 것이었다. 친구가 실검 1위가 되는 기분 좋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소식은 이후 급변했다. ㄱ씨의 입학을 환영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을 두고 ‘생물학적 여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입학을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거셌다. 급기야 ㄱ씨는 입학을 포기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남성’이 ‘여성’의 공간에 들어온다는 이유였다. 여대라는 ‘금남’의 지대에 자신을 숨기고 은밀히 들어오는 ‘남성’에 대한 공포가 그 위험의 실체였다. ‘트랜스젠더’라는 기표를, 마치 여성을 성적으로 탐닉하고 침범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격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법적 성별정정 제도를 마치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합법적 경로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이 제도 자체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 만들어진 ‘트랜스젠더 여성’은 성범죄를 하기 위해 생을 바치는 그런 존재처럼 그려졌다.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로 보였다. ㄱ씨가 여자대학에 입학했다면 여성들과 함께 지냈을 것이라는 점 말이다. 여성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여자 화장실에 가고 때로는 엠티를 함께 갔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ㄱ씨를 모르지만 무언가 결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수업시간에 가끔 졸기도 하고, 노래나 춤이나 체육을 잘 못 하거나, 무척 소심하거나 엄청 활달한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일부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며 무관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떤 수업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해 토론하고 때로는 의견을 내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트랜스젠더를 주제로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의 경험을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분법적 성별의 경계에 서 있던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성성/남성성에 대해 낯설고도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같은 팀이 되어 과제를 하면서, 국가가 지정하는 성별제도의 불합리함과 한계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자대학 안에서 젠더 불평등과 페미니즘의 논의가 조금은 더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트랜스젠더 여성인 친구 박한희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여성으로서의 경험에 한정된 나의 인식을 확장해주는 고마운 동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실 나는 박한희의 성별 정체성이 무엇이든 별 상관이 없다. 여성이어도 남성이어도 그 무엇이어도 관계가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거나, 모욕이나 폭행을 당한다거나,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공부나 일을 하지 못하는 문제는 나에게 상관이 있다. 그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처럼 오해받는다면 견디기 어렵다. 상상 속의 소수자가 내 곁의 친구가 되었을 때, 사회정의의 문제는 삶이 되고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여자대학은 누군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평등을 지향해 만들어진 의미 있는 공간이다. 획일화될 수 없는 수많은 여성의 삶이 매년 이곳에서 교차하여 만나고 그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확장된다. 언제나 존재했겠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트랜스젠더 한 사람이 입학을 포기하게 된 이번 사건이 남긴 큰 아쉬움의 하나는 이것이다. 성평등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 공간에서, 오랜 고민을 나눌 또 하나의 삶을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잃었다는 것.

이런 만남의 기회를 계속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사람은 사라지고 머릿속 괴물만 더 자라지 않을까. 평등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상상 속의 괴물과 싸우느라, 정작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부정의를 방관하고 키우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누군가 말하길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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