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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전염병, 인종주의의 수렁 / 최원형

등록 2020-02-11 18:17수정 2020-02-12 02:36

최원형 ㅣ 사회정책팀 기자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전염병의 유행이 걱정되는 어느 날, 지하철 속 당신의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당신의 머릿속은 그가 중국어로 통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부터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중국인일까, 아니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일까? 혹시 전염병이 처음 유행했다는 지역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자주 만나는 친구 중에 그 지역 출신이 있을 수도 있겠지?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옮았을 가능성은? 아니면 한국인인가? 그래도 중국인 친구랑 자주 만나는 사람이면 어쩌지? 본인이 최근에 중국에 다녀왔을 가능성은?

이렇게 머릿속에서 가상의 ‘확률 게임’을 시작한 순간 당신은 이미 ‘인종주의’라는 수렁에 발끝을 담근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안전을 최대치로 확보해야 한다는 명분을 동력으로 삼은 이 게임은, “중국인 국내 입국 전면 금지” 주장처럼 결국 나름의 인종적 기준에 근거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셈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전염병 유행이라는 ‘예외 사태’는 이런 셈법을 정당화해준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동원한 합리성이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인종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사실 그리 멀지 않다.

‘중국인 유학생’은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드러내는 하나의 형상이다. 외국인 유학생 16만명 가운데 7만명이 중국 출신이라 하니 정부 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성은 있을 것이다. 교육부는 지난 5일 내외국인 구분 없이 “중국에서 입국하는 학생”은 특별입국절차를 거치며 이들에게 2주 동안 ‘자율 격리’(등교 중지)를 권고한다는 조처를 내놨다. 이날 기준으로 전체 256곳 대학에서 지난 2주 동안 중국 후베이성을 방문했던 학생·교직원 현황을 보면, 유학생 48명, 한국 학생 56명, 교직원 13명으로 한국 학생 수가 되레 더 많다.

그러나 공포는 국적에 반응했다. “대학가를 덮친 중국인 유학생 공포” “중국인 유학생 7만명 몰려온다” 따위의 기사 제목이 보여주듯, 모든 게 중국인 유학생의 문제로 귀결된 것이다. 국적을 기준으로 삼아,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잠재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라고 규정해버리는 태도다. 이들과 수업을 함께 받는 것도, 기숙사와 식당을 함께 쓰는 것도 ‘불안하다’는 목소리가 집중적으로 보도됐다. ‘자율 격리’ 조처만으론 지역사회를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이런 공포를 실컷 보도한 언론들은 “그럼에도 차별과 배제는 안 된다”는 한줄을 덧붙여놓았을 뿐이다.

최근 유럽에서 ‘동아시아인 혐오’ 기류까지 나타나는 등 전세계적인 유행병은 날이 갈수록 인종주의와 강하게 결합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우한 출신을, 한국에서는 중국 출신을, 유럽에서는 동아시아 출신을, 저마다의 확률 게임에 근거해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동심원이 그려진다. ‘열대 의학’의 거장인 로버트 데소비츠는 “국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적 환상이다. 병원체는 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염병에는 국경도 국적도 인종도 없는데, 이에 맞서야 할 인간들은 서로 국경, 국적, 인종을 따져가며 사분오열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서구 열강은 열대병을 ‘다른 지역’에 있는 ‘그들’의 병이라고만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은 나라와 지역의 구분 없이 공조하는 것이 국제 보건의 기본 원칙으로 받아들여진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두고 머릿속에서 확률 게임을 벌이는 것까지 나무랄 수야 없다. 다만 그 결과로 나오는 말과 행위는 인류라는 공동체 차원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이기 때문이다. 국적과 인종 등을 기준으로 들며 선별적으로 자리를 내어주는 거짓 환대는 어떤 공동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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