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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논란도 해법도 부실한 성락원 시비 / 노형석

등록 2020-02-02 18:50수정 2020-02-03 11:40

노형석

문화팀 선임기자

옛 유물과 유적이 국보, 보물, 사적, 명승 같은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려면 ‘한 방’이 필요하다. 바로 뛰어난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기록, 흔적 따위의 근거들이다. 전문가 검증과 논의는 당연한 전제다. 그런데 요즘 문화재청에서는 거꾸로, 수십년 전 지정한 국가유산을 놓고 뒤늦게 지정 사유와 명분를 찾으려 골몰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풍광 좋은 정원 성락원 이야기다. 지난해 4~6월 일시 개방된 직후 학계와 언론에서 국가명승 유지·해제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면서 촉발된 사태다.

성락원은 1950년대 이후 실업인 소유주가 다시 정원을 꾸리면서 많이 변형됐지만, 서울 시내 유일하게 남은 조선 말기 전통 사설 정원의 자취가 분명하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뒤늦은 논란을 벌이면서 고종 때 중인 계층 문인이던 내시 황윤명이 성락원 터에 별저와 정원을 운영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새로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 정원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해 유포한 건 문화재 당국이다. 1992년 국가사적 지정 당시 건물, 연못, 옹벽 등의 경관이 상당 부분 신축·변형돼 사적이 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현장 조사자들한테서 나왔는데도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이 지정을 밀어붙였다. 강행한 근거는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이 거처한 별저 정원이란 내력이었다. 80년대 한 조경 전공 대학원생이 당시 소유자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쓴 잡지 기고 글이 유일한 근거였다.

2000년대 들어 학계에서 심상응이란 인물은 완전히 허구란 지적이 나오면서 논란이 피어올랐다. 뒤가 켕긴 문화재청은 2008년 성락원의 빼어난 경관성을 앞세워 명승으로 지정 종목을 슬쩍 바꿔버린다. 이후 논란은 잠복했다가, 지난해 4월 23일 성락원이 한시 개방되면서 언론의 요란한 소개보도에 뒤이은 역사 고증 공방으로 다시 불거졌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4월 18일치 <조선일보>에 성락원을‘조선 3대 정원’이라며 극찬하는 인터뷰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그가 언급한‘조선 3대 정원’을 기사제목으로 따거나‘200년 만의 비밀정원 개방’, ‘관람 예약이 로또 당첨보다 어렵다’등등의 낯뜨거운 홍보성 기사들이 1달여사이 300꼭지 이상 쏟아졌다. 정원이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저였고, 20세기초 조선왕족 의친왕 이강에게 넘어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장소가 됐다는 식의 과장, 왜곡된 기사들도 판쳤다. 실상을 보다 못한 한 소장 연구자가 성락원에 심상응 별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꼼꼼한 사료적 근거를 붙여 5월2일 온라인 매체 <뉴스톱>에 기고로 알린 것이 반전의 계기가 됐다. 5월 말 문화재청이 이를 시인하면서 홍보성 기사들은 자취를 감췄고, 성락원을 명승으로 유지할 것인지, 취소할 것인지를 놓고 학계의 공방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파문이 커지자 정재숙 청장은 지난 6월과 8월 국회 상임위와 학계 토론회에서 고증 잘못을 일부 인정하고 성락원을 포함한 명승 유적 20여곳에 대한 전수조사를 약속했다.

지난해 4~5월 일시개방을 놓고 언론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300개 넘는 홍보성 기사를 남발한 성락원 보도는 한국 문화재 언론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심상응 별저설이 오류임을 오래 전 자체 조사로 파악했으면서도 언론이 대서특필하자 국회의원과 청장의 현장 답사까지 계획했다가 슬쩍 철회한 문화재청의 보신적 행태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청과 산하 연구소는 당당하게 고증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하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스스로 실상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치만 보다가 일부 연구자의 폭로와 언론 지적을 받고서야 조사 방침을 밝혔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다섯달이 지난 1월30일 문화재청은 뜬금없는 방침을 발표했다. 성락원 논란을 계기로 천연기념물과 명승 등 자연 문화재 지정 체계 전반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마련하는 등 개선 작업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원칙은 반년 전에 청장이 진작 밝히지 않았는가. 청에 세부를 물어보니, 2월부터 예산 집행이 확정돼 이제서야 역사성 검증 조사를 하고 올 하반기엔 경관성 검증을 진행한다고 한다. 굼뜨고 경직된 행정 관행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국가지정문화재에 대한 자의적이고 부실한 고증은 국내 문화재 행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단청 등의 고증 미비에서 비롯된 숭례문 부실 복구의 악몽이 생생하다. 전문가 자문으로 확실히 원형을 찾았다고 자만하다가 반박 사료가 쏟아지면서 논의가 원점으로 되돌아간 광화문 현판 복원계획과, 거액을 들여 원형을 고증하고 건축물을 복원했으나, 전혀 다른 앞면 모양새의 옛 건물 사진이 이후 발견돼 원형 논란이 도로 재연된 덕수궁 중명전 등 세간에서 손가락질을 받은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언론이 지적할 때만 찔끔 대응할 게 아니다. 역사·문헌학계 연구와 연관된 검증 데이터베이스 확보나 공조 강화 대책 등 구조적 해결 방안을 내놓는 것이 우선 긴요하지 않을까. 왜 무리한 지정이 강행됐는지도 청 스스로 진상을 밝혀야 한다.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성락원이 심상응의 별저라는 허위 정보가 아직도 버젓이 검색된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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