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 ㅣ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소란과 괴담에 지친 일상을 잠시 괄호 안에 가두고, 추운 도시를 걸었다. 도시의 바람은 세찼지만 공기는 투명했고 빛은 예리했다. 용산과 마포 일대를 한걸음에 횡단하다니. 타고난 게으름뱅이가 바람구두를 신은 랭보라도 된 양 걸어서 도시를 가로지르다니. 이 예외적 사건은 효창공원 근처에서 가좌역까지 이어지는 긴 선형 공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대로를 따라서는 절대로 걸을 수 없는 거리다.
서울에서 가장 긴 공원, 경의선숲길은 6.3㎞의 폐철로 부지에 만든 선형 공원이다. 경의선(용산선)을 지하화하면서 남겨진 쓸모없는 땅이 도시의 활기와 자연의 생기를 동시에 품은 공원으로 변신했다. 한양을 오가던 상인들의 고갯길에 경성과 의주를 잇는 철길이 놓여 한 세기가 쌓였고, 이 오랜 시간의 켜 위에 새로 얹힌 공원이 자유로운 산책과 넉넉한 휴식을 품는다. 경의선숲길에는 ‘연트럴파크’라는 별명을 얻으며 번잡한 ‘핫플’로 뜬 연남동 구간만 있는 게 아니다. 나머지 코스 대부분에선 소용과 실용의 임무를 훌훌 털고, 그냥 길이 있기에 걸을 수 있다. 도시가 다시 보인다.
경의선숲길의 가장 큰 매력은 선형이라는 점이다. 넓은 면으로 구획된 초록과 낭만의 별천지 공원이 아니다. 도시를, 그것도 도시의 낙후된 뒷면을 매끄럽게 관통하며 잇는, 혈관 같은 선형 공원의 힘. 도시의 일상과 접속하고 풍경과 대화하면서 소요할 수 있다. 6㎞가 넘기 때문에 공원과 도시 조직이 직접 만나는 접선이 양방향에서 12㎞ 이상이다. 공원은 도시로 확산되고, 도시는 공원으로 수렴된다. 기찻길을 등지고 서 있던 낡은 주변 건물들의 문이 공원 쪽으로 새로 나고 있다. 긴 공원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흐름의 선들이 생겨나면서 공원과 도시가 함께 자라고 있다.
긴 선형이지만 전체 노선을 완주할 이유가 없다. 언제든 선로를 이탈해도 된다. 어디서든 들어와 어디로든 나갈 수 있다. 입구와 출구가 따로 없고 공원 안팎을 가르는 울타리도 없다. 철길을 보존하거나 재현한 바닥 재료 선정이 섬세하고, 지그재그형 보행 동선으로 공원 길의 절곡부와 주변 동네 길을 만나게 한 디자인이 뛰어나다. 길이가 긴 만큼 경의선숲길에 붙어 있는 장소와 경관도 다양하다. 검박하지만 다채로운 도시의 이력과 문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가장 늦게 완공된 동쪽 끝 원효로 구간에는 옛 철길의 흔적과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많이 남아 있다. 조금 더 힘을 내면 효창공원에 이른다. 조선시대 선혜청의 창고가 있었다는 새창고개 구간에선 한강으로 흐르는 서울의 옛 지형을 조감할 수 있다. ‘미니멀’하게 디자인된 염리동 구간에는 번성한 마포나루 덕에 형성됐던 소금장수 마을의 생활사가 묻혀 있다. 제일 먼저 완공된 대흥동 구간은 봄이 되면 화려한 벚꽃의 성지로 변신한다. 인적이 드문 편인 신수동 구간을 한가롭게 걷다 보면 마포의 대명사 숯불갈비 식당들로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땡땡거리’라 불리던 건널목 풍경을 재현해 놓은 와우교 구간에선 여러 출판사가 위탁 운영하는 책방들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책거리에서 몇 발짝 벗어나면 홍대 권역의 소극장, 박물관, 도서관이 빼곡하다. 가장 북적이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연남동 구간이다. 해 질 녘 이 ‘연트럴파크’를 지나 가좌역 쪽을 향하면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마저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지만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눈 박고 걷는 사람이 없었다. 억압받는 팔다리의 능력을 해방시키고 건강한 리듬과 활기찬 표정으로 도시를 걷는 사람들을 경의선숲길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