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나에게 조국 가족이 벌인 ‘기회의 사재기’가 기소 요건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물음이 아니었다. 이를 계기로 교육계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불평등의 세습’을 주제로 치열하게 토론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교육은 한 사회의 생산력을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한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클로드 파스롱이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던 게 반세기 전의 일이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설령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해도 그는 이미 개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최근 <세습 중산층 사회>를 펴낸 조귀동은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부제가 달린 책(독자의 일독을 권한다)에서 “90년대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수준으로 어려워졌다”고 썼다. 또 “한번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내부자로 남는다.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기타 비정규직-일용직 등이 되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고 썼다. 오늘의 20대는 그들의 부모 세대인 86세대와 전혀 다른 교육과 사회 환경에 처해 있다.
그렇다손 쳐도 조국 부부의 행태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혹자는 정유라와 견주기도 한다. 하지만 최서원은 교육자가 아니었다. 또 혹자는 ‘인디언 기우제’나 ‘태산명동서일필’을 운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고 있을 만큼 대수롭지 않다는 얘긴가? 놀라운 일은 그런 주장에 대학교수 등 교육자나 시인들까지 거들고 나선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조국 부부가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과거 신민 교육의 대상이었던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은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점차 고객이 되었다. 최근에 교육계에서 민주시민교육을 말하기 시작했을 만큼 우리 학교에서는 오랫동안 시민교육을 하지 않았다. 교육은 존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수단이 되었고, 학생들은 시민이 되기 전에 고객이 되었다. 교육의 세 주체 중 학부모회만 법제화된 일이나 교사들이 각종 잡무 외에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는 일, 또 학생들이 교실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거나 학원 강사가 학교에 초빙되는 일 등은 모두 학생들이 시민이 되지 않은 채 고객이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시민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의식을 갖지만, 고객은 구매력을 행사할 뿐 의무와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고객들에겐 신민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이며 집단 귀속성이 강하다.
시민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채 구매력을 가진 집단의 팬덤화, 특히 미디어의 장에서 이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구매력에서 비롯된다. 유시민씨의 “힘으로 제압해야…”라는, 민주주의자라면 꺼내기 어려운 발언에 담긴 힘도 구매력을 가진 팬덤의 힘이다. 시민단체들은 회원 떨어져나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진보 매체들은 독자 떨어져나가지 않을까 압박을 느낀다. <한겨레>는 창간 때부터 대통령 부인을 ‘이희호씨’ ‘권양숙씨’ 등으로 표기하는 원칙을 세웠다. 경어체를 비롯하여 한국어의 복잡한 호칭이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인식 아래 세웠던 원칙이었는데, 2년여 전부터 ‘김정숙 여사’로 물러서야 했던 것은 구매력을 가진 팬덤의 압력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한겨레>는 ‘권양숙씨’에서 ‘김정숙 여사’라고 쓰는 만큼 민주주의 성숙을 지향하는 진보 매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훼손을 감수한 것이다.
시민단체 회원이나 진보 매체의 구독자는 회원이나 구독자가 될 만큼 구매력이 있는, 그래서 20 대 80의 사회에서 ‘20’의 하층이나 ‘80’의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이므로 ‘80’ 중 하층이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에는 관심이 옅은 편이다. 구매력을 행사할 뿐 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의식이 부족한 팬덤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진보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에도, 오히려 그들이 민주주의와 진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역설이 관철되고 있다. 권력 실세의 스핀 닥터들과 미디어 장사꾼들의 이해관계가 연결돼 있다고 귀띔을 해줘도 소용없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정치의 종교화, 팬덤화’와 함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가 없는 한국의 ‘죽은 교육’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회의할 줄 모르게 만듦으로써 그 어느 사회보다 확증편향의 함정을 깊고 공고하게 팠다는 점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회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와 토론을 거의 하지 않는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대신 암기한다. 그것도 정답이라는 고정된 형태로다. 생각하는(=회의하는) 과정 없이 고정된 정답을 의식세계에 주입한 우리가 고집불통이 되는 만큼 확증편향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자주 꺼내는 말인데, 한국 사회는 설득이란 말은 있어도 설득이 되지 않는 사회다. 가령 부부 사이는 어떨까? 애정으로 맺어졌고 계급적 처지도 동일한 사이지만, 생각이 다르고 삶의 가치관이 다른 채로 일생 동안 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 이것이 한국의 대부분의 부부가 보여주는 서글픈 자화상 아닌가. 이렇게 부부 사이에도 설득이 되지 않는데 누구를 설득하겠는가.
실상 우리는 아무도 남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나 또한 아무한테도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간다. 이런 사회 구성원들에게 확증편향이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함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 ‘나’로서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지혜도 갖기 어렵다. 나의 자리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겠는가. 한국인의 확증편향을 강고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길 말고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홍세화 ㅣ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연재홍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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