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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어떤 밧줄 / 박진

등록 2019-12-30 18:16수정 2019-12-31 13:16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고통의 직격탄을 맞은 것은 나 혼자라 생각했어요. 좌절도 오롯한 내 몫인 줄 알았죠. 어느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데, 신발에서 발뒤꿈치가 빠져나오지도 않았을 때 방문이 ‘탕’ ‘탕’ 하며 닫히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빠의 귀가를 반가워하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비극의 종지부를 마침내 찍게 되었다며 기뻐하던 지난해 여름쯤, 김주중씨의 대한문 분향소를 지키는 해고자 ㄱ에게 들은 말이다. “정리해고를 겪으며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2009년 8월5일의 옥상을 조용히 감당하며 살았다.” 쌍용차 해고 사태 서른번째 희생자 김주중씨가 남긴 말이다. 살았던 김주중씨의 분투는 죽은 후에야 기록됐다.

지난해 9월21일 해고자, 기업노조와 회사, 정부가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 사측은 2019년까지 해고자 47명에 대한 단계적 복직과 부서배치 완료를 약속했다. 올해를 보내는 연말이 되자 복직 앞둔 해고자들의 에스엔에스(SNS)에선 흥분된 기운이 감돌았다. 11년 만의 출근길에 오를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탄절 전날에 회사로부터 통보받았다. 회사 내 노사가 ‘무급휴직 중인 노동자 휴직 기간 연장에 대해 합의했다’, 즉 ‘아직 너희들이 돌아올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복직을 위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낸 날 통보받은 이도 있었다. 사회적 합의의 주체 중 단둘만 만나 약속을 파기했다.

쌍용차 해고 사태가 벌어진 뒤 11년이 지났다. 단지 해고일 뿐이었는데 해고 하나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서른번을 꼬박 들었다. 그런데 바뀐 것이 없다. 대량의 정리해고를 막을 수 있는 사회적 노력에 대해서도, 툭하면 직장폐쇄로 노동자들 쫓아내는 게 손쉽기 짝이 없는 사회가 변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외국 자본이 기술력을 가로채고 튀는 동안, 관료들이 부패하지 않았는지 해명하지도 않았다. 2심 판결대로 부자 회계사와 부자 변호사들이 회계 조작을 했는지, 진실을 밝혀주지도 않았다. 노동자 수천명이 회사의 비극을 오롯이 감당하는 동안 반성하고 책임지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명제가 진짜가 되는 동안, 한 것이 없다. 일자리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인간답게 살아남는 사회에 대한 대책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런데 더 막막한 것은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는 알겠는데, 누가 무엇을 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는지 책임을 물을 ‘주어’는 찾지 못했다. 주어가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가족들은 계속 상했다. 그런 마당에 고작 47명 복직시키는 것조차 어렵다. 사회적 합의를 헌신짝처럼 버린 저 회사를 단죄할 방법조차 없다.

“밧줄을 상자를 묶는 데만 사용한다면 밧줄의 튼튼함을 쉽게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밧줄에 의지해 절벽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고 가정해보면 그 밧줄을 진정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게 되지 않겠는가?” 소설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의 이 은유는 사별 후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에 인용됐다. “화창한 날을 믿었거나 건강과 안전, 소중한 것들이 내일도 곁에 있으리라는 생각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토대들을 줄곧 믿었다면, 슬픔이 닥쳤을 때 스스로 잘 속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잡고 있는 밧줄이 선물을 포장할 때나 쓸모 있는 것임을 알았다. 쌍용차 사태를 통해, 생존하기 위해 잡을 수 있는 밧줄이라고 믿은 것이 썩은 밧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배운 것은 없다.

원치 않는 갑작스러웠던 해고의 피해를 숫자로 따진다면 얼마만큼일까. 가족의 머릿수만큼 곱하면 될까. 3천명의 3배일까, 5배일까, 아니면 먼 고향에서 노심초사하는 부모님 것까지 합쳐 7배일까, 10배일까. 해고자 ㄱ은 말했다. “그제야 알았죠. 우리는 11년 동안 재난 지역에서 생존한 동반자라는 것을. 가깝기 때문에 가장 만만했고, 가장 잔인하게 고통을 퍼부으며 살아남았죠.” 평범한 삶들이 밑동째 ‘툭’ 하고 잘려나갔다. 그러나 회사와 기업노조는 외면했다. 약속 파기는 그걸 의미한다. 같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 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남을 살리려면 책임지라는 뜻이다. 2020년 새해에 47명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그들이 잡을 밧줄이 없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밧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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