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내가 ‘4·19 세대의 시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이미 여든 안팎에 이른 이 세대의 유효성을 반성하며 시대 변화에 따라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세대교체를 기대한 때문이었다. 그 기대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1960년의 학생혁명 세대들은 벌써 물러나 있고 문제는 다음의 ‘386세대’였다. 나보다 거의 30년 젊은 50대 한창의 연령층에 대한 논의가 내게 잇따라 다가온 것이다. 순서대로 적으면 조국 사태에 대한 찬반에서 세대론이 ‘진영론’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 이철승의 도발적인 저서 <불평등의 세대>가 386세대의 장기 권력 장악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 흐루쇼프 시절에 태어난 문화인류학자 알렉세이 유르착이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에서 강고한 소비에트 체제가 어떻게 허물어졌는지를 세대문화의 변화로 분석하고 있던 것, 그리고 보수신문이 ‘40대 리더가 세계를 바꾼다’는 제목으로 세계의 리더들이 40대로 젊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1면 머리로 다룬 후 20~30대의 대망론을 제기했던 점들이다. 좀더 말하면 이렇다.
조국에 대한 지지와 반대가 지난여름 이후 여러 주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였는데 여론은 세대론으로보다 진영론으로 뜨겁게 번졌다. 조국 찬반 문제는 80년대 운동권과 다른 세대 사이의 관점 차이가 아니라, 같은 세대에서도 광화문 광장과 서초동 거리의 위치로 진지를 달리한 ‘관계의 자리’가 크게 작용했다. 이런 변화의 기본적 요인은 비슷한 연령층의 공통된 인식에서 형성되던 의견들이 이제 이해의 사슬을 같이한 진용의 갈라진 의지로 바뀌었다는 것에 있음을 가리킨다. 비슷한 세대의 경험이 현실 집단의 이해로, 시대의 흐름이 관계의 사슬로 판단 기준이 옮겨갔음을 뜻한다. 세대란 역사의 단계적 흐름을 가리켜주지만 진영은 분열된 역사의 종단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시대와 현실의 인식이 상충할 경우가 많다. 정치에서는 정당이란 제도화된 공적 집단이 있지만, 진용은 사적인 파벌로 사유화된 관계다. 논의가 진영론으로 옮겨가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경직, 후퇴한 것이다.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진영론이 전개되었다면 그것은 또 오늘의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386세대의 분열을 시사한다. <불평등의 세대>에서 이철승은 이 세대를 “자본주의하 시민사회를 조직화한 첫 지식인 그룹”으로 규정하고, 우리 정치를 군부정권에서 시민정권으로 민주화하면서 한국 경제를 선진 수준으로 이끌어온 주도세력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 프로젝트를 통해 ‘평등의 가치’를 한국 사회에 전파한 첫 세대로, 그 자신은 동아시아적 위계문화를 여전히 체내화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임에도 “상층 리더들이 다른 세대에 돌아가야 할 몫을 더 가져갔기 때문”에 “세대 내 불평등이 세대간 불평등보다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386세대는 20여년의 장기집권을 거치며 현장의 급속한 변화와 혁신에 둔감해졌고 내부자 위주의 이해관계에 더 민감해지며 글로벌 기업 생태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응전하는 감응력과 순발력이 뒤처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을 모두 장악한 386세대가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는가. “데이터는 ‘그렇다’라고 답한다”는 말로써 이 세대의 퇴장을 종용하고 있다.
소련의 전기공학도에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 변신한 유르착은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에서 이념 혹은 주장이 강력한 세대가 어떻게 무너져갔는지 그 과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1960년에 태어난 저자는 소련의 강력한 이념체제가 슬그머니 사라져가는 사태를 ‘하나의 역설’에서 발견한다. 서구가 68혁명을 치를 때 러시아도 “재즈, 라디오 방송, 패션, 영화, 언어, 록 음악 따위의 외국 문화형식들이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비판받는 동시에 장려되고 공격받는 동시에 발전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레닌과 레드 제플린 양쪽에 열광하는 일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게 된 사회문화적 변화를 주목한다. 유르착의 이 관찰은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의 풍속적 개방 문화에서 정치적 자유를 소망한 1970년대 유신 초의 내 기대를 회상시켜주었다. 독일의 통일과 동유럽 세계의 해체를 잇달아 일으킨 고르바초프의 개방-민주화 물결도 그렇게 ‘하나의 역설’에서 출발했다. “소비에트연방의 극적인 몰락은 대부분 소비에트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태였지만, 막상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깨닫자마자 자신들이 그 뜻밖의 변화를 사실상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함께 깨닫게 되었다는 역설이다.”
세대 변화에 대한 수선스러운 생각들이 오갈 때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내세우며 ‘40대 리더가 세계를 바꾼다’는 도발적 기사가 전통 보수신문인 <동아일보> 1면 머리글(10월16일치)로 실리고 ‘양극화-부패정치에 지친 세계, 변혁 이끌 젊은 해결사 원하는’(10월17일치 5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선 그 실제 사례들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선언하며 김대중과 함께 세대교체를 요구한 것이 꼭 50년 전이었다. 그것은 케네디와 오바마가 40대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던 시간 거리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 젊은 세대도 앞자리의 3이 5로 늘어난 86세대의 퇴진을 주장하며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을 진지하게 제창(해야)할 때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50년의 한국전쟁, 60년의 4·19, 70년의 유신, 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90년대 초의 민간정부로 10년마다 변혁을 치른 숨가쁜 정치사 속에서 일어 세대, 한글 세대, 운동권 세대를 잇달아 키워왔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얼 세대를 일으켜 문화와 정치, 환경과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준비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2000년대로 접어든 지 20년이 되었다. 우리는 후진적 빈곤에서 선진적 성장사회로,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중심부 가까운 경제로, 남북 대결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단계로, 이념의 금기에서 전방위적 자유로, 아날로그적 사유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모든 측면이 한 세대 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정치만이 오히려 진영 논리로 뒷걸음질할 뿐이다. 전세기의 영국은 보수당의 처칠이 세계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었음에도 전후의 선거에서 노동당의 애틀리를 선택했다. 시대와 임무가 달라지면 그 지도자도 새 환경에 어울릴 새로운 인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역사에 기여한 86세대에 대한 대우도 충분했다. 이제 품위있고 타협적인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새로운 미래를 선취할 젊은 40대 기수론이 선언된다면 나는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다.
김병익 ㅣ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