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그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 40주년을 1년 앞둔 현재까지도 광주학살을 불러온 발포 명령 등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뭔 소릴 하든 무슨 상관이야, 알츠하이머라는데. 사실 치매가 아니라도 줄곧 그를 무시해왔다. 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 상가에서 그의 살굿빛 얼굴을 봤을 때, 욕먹고 나쁜 짓 해도 잘 산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전두환을 암살하려는 5·18 유가족을 다룬 영화 <26년>의 애절함이 잠깐 떠올랐지만,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노인의 삶이 뭐 그리 대수일까 싶었다.
전두환이 최근 강원도 홍천에서 골프를 즐기다 딱 걸렸다. 너무 멀쩡했고, 참 뻔뻔했다.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묻는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에게 “너 군대 갔다 왔냐”는 조롱과 함께 “명령을 내릴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고인이 된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광주지법에 구인된 그가 밀려든 기자들에게 “이거 왜 이래”라고 역정 낼 때만 해도, 잠시 없던 측은지심이 생겼다. 법원이 치매를 이유로 이후 재판 불출석을 허가했을 때도, 그럴 만하다고 넘겼다. 이제는 의심스럽다. 치밀하게 기획된 ‘사기극’에 그의 악행을 잊고 너무 관대했던 게 아닌지.
11월11일 광주지법,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8차 재판정. 전두환 쪽 정주교 변호사는 “전씨 불출석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너무 멀쩡한 골프 라운딩 모습이 공개돼 불출석 허가가 취소되고, 다시 법정에 불려 나올까 봐 법 논리 뒤에 숨는 전두환에 견줘 우리는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여전히 ‘각하’였다. <뉴스타파>의 전두환 추적 프로젝트 덕분에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10월24일 노신영 전 국무총리 장례식장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조문 온 전두환에게 “안녕하십니까, 반기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알아요. 반기문을 모를까 봐”라고 답한다. ‘광주학살’ 사죄를 요구하는 취재진에겐 묵묵부답, 차에 올라탄 그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반 전 사무총장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여전히 ‘각하’로 대접받는 현실, 전 재산 29만원뿐이라며 경호원을 대동하고 골프 치고, 102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하고도 연희동 자택은 부인 이순자와 비서관 재산이라며 강제집행을 피하고…. 그는 국민과 법정을 그렇게 조롱하며 잘 살아왔다.
올해는 12·12 군사반란 40년, 내년이면 ‘광주학살’ 40년이다. 1988년 광주 청문회, 1997년 역사바로세우기, 2007년 과거사조사위 조사, 2017년 국방부 특별조사단 조사까지 네번의 진실규명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과 그 일당이 잠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을 뿐 발포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고, 암매장 의혹도 여전하다. 헬기 기총소사, 계엄군의 시민 성폭행 사실 등이 새로 드러났지만 관련자들은 딱 잡아뗀다.
<뉴스타파>의 ‘전두환과 잔당들…그들은 잘 산다’를 보면 전두환과 그 측근 77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두환 일당은 반란군이 아니라 ‘각하’로, 보수 원로로, 수십 수백억 자산가로 안온한 삶을 살고 있다. 특전사령관 출신 정호용은 1천억원대 자산가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등을 지낸 허화평은 전두환이 설립한 것으로 의심되는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침묵의 미덕도 없다. 태극기부대의 주역으로 ‘좌파’ 공격에 앞장선다. 제1공수여단장 출신 박희도는 “무장폭도가 민주화투사가 되고, 군은 반란자가 돼 훈장을 박탈당했다” “나라가 폭동세력한테 넘어간다”고 선동한다. 허화평은 “희생자가 용서할 때 가장 아름답다. 내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살해당한 자식의) 부모가 찾아가 사과할 때 국민이 감동한다”며 되레 피해자에게 통 큰 용서를 요구한다.
북한군 개입설, ‘5·18 유가족 괴물집단’ 비난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우리가 극장에서 <택시운전사> <1987>의 저항과 감동을 공유할 뿐 학살자의 돈과 강고한 ‘수구 네트워크’, 그 뻔뻔함의 벽을 허물 만큼 집요하지 못할 때 그들은 발호한다. 임한솔 부대표, <뉴스타파>처럼, 끊임없이 전두환과 그 일당의 책임을 묻고 단죄하는 게 일상이 돼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최소한 입이라도 다물 것이다.
신승근ㅣ논설위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