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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대북 제재’라는 신학 체계 / 고명섭

등록 2019-10-27 16:44수정 2019-10-28 02:35

“워싱턴에 갔더니 한 친구가 ‘시올로지 오브 생션’(theology of sanction)이라는 말을 했다. 미국에 ‘제재라고 하는 신학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가 지난달 <한겨레>와 인터뷰하던 중에 한 말이다. 강력한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의 행태를 바꿀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 미국 조야에 널리 퍼져 있다는 얘기다.

문 특보의 말대로 미국은 지난해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시작한 이후로도 대북 제재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달 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이 결렬로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랜들 슈라이버 미국 국방부 차관보는 지난 15일 ‘중국 방어와 안보’ 회의에 참석해 중국이 대북 제재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그 발언의 배후에도 ‘제재 신학’이 있다. 제재를 유지·강화해야만 북한이 굴복하고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슈라이버는 중국 영해에서 대북 금수 품목들이 ‘선박 대 선박’ 환적 방식으로 북한에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중국의 대북 압박이 유지돼야만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널리 퍼진 이런 ‘제재 신앙’이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오히려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 북한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스톡홀름 협상에서 김명길 북한 순회대사는 미국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만 15차례나 대북 제재를 추가로 발동했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스톡홀름 협상 결렬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백두산에 올라 제재로 인한 인민의 고통이 분노로 변했다며 ‘자력갱생’ ‘자력부강’ ‘자력번영’을 외쳤다. 제재 압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급기야는 ‘금강산 남쪽 시설 철거’라는 초강수까지 들이밀었다. 김 위원장의 현지 시찰에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동행한 걸 보면, 말은 남쪽에 대고 하고 있지만 눈은 미국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재 압박은 대화를 하자며 한 손으론 악수를 청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들이미는 것과 같다. 국제정치가 아무리 정글의 싸움이라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려면 미국의 ‘제재 만능 신앙’부터 걷어내야 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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