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사회비평가
(이 글은 스포일러투성이다.) 개봉 전부터 소셜미디어에 비난이 폭주하고, 심지어 영화를 보지도 않은 평론가가 악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영화 <조커>를 둘러싼 논란이 격렬하다. 이 영화를 두고 “일베들이 날뛰는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단평을 남긴 대중문화매체 기자도 있었다.
예전부터 일베 유저들을 최하층 ‘루저’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게으른 착각이다. 일베는 초저임금 노동시장에서 이주노동자와 경쟁하다 다문화주의에 반감을 갖게 된 소위 ‘기층우파’ 집단과 다르다. 일베는 상징자본을 제법 갖춘 집단이며, 이는 정당화 논리, 담론 전략, 어휘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2014)
일베의 일탈을 하나로 꿰는 것은 계급적 박탈감이나 분노가 아니라 극단적 능력주의다. 여성 혐오, 호남 혐오, 진보 혐오 등 모든 혐오가 능력주의 논리로 정당화된다. 한마디로 ‘자격과 능력이 안 되는 것들은 벌레 취급 당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일베의 ‘학력 인증’ ‘직장 인증’ 사진은 상대적 우위자의 비열한 속성, 요컨대 강자 선망과 약자를 향한 폭력성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영화 <조커>는 반영웅 서사이자 반능력주의 서사다. 배제되고 차별당하다 숨겨진 능력을 깨닫고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전형적 영웅서사라면, 아서 플렉은 배제되고 모욕당하다 자신에게 숨겨진 능력 따위는 없음을 깨닫고, 아니 현실은 더 ‘시궁창’이라는 사실만 깨닫고 안티 히어로가 된다. 그리고 되묻는다. 능력이란 게 대체 뭐냐고.
조커, 이 ‘웃음의 무능력자’는 남을 웃기지 못할 뿐 아니라 웃기지 않은 상황에서 웃는다. 지하철에서 여성을 성희롱하는 세명의 ‘금융맨’은 등장할 때부터 웃고 있었다. 웃지 못하는 이는 겁에 질린 여자와 눈치만 보던 아서다. 그런데 웃음병이 도지는 바람에 아서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만다. 세 남자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뭐가 그렇게 웃기냐”며 아서를 폭행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이 윤리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여성을 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서의 돌발적 웃음이 웃음의 권력 효과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웃음을 해명하는 많은 이론 중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건 아리스토텔레스와 홉스로 대표되는 ‘우월 이론’이다. 남의 바보 같은 모습을 보면 자신이 우월하게 느껴지기에 웃는다는 것이다. ‘금융맨’들의 웃음은 우열과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는 홉스적 웃음이었다. 그 자리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강자들, 세명의 남자여야 했다. 그런데 그 웃음의 권력을 아서가 침범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아서의 무능력은 매끄럽고 공고한 기존 질서에 불길한 동요를 일으킨다. 영화 속 주차장 농담처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보편적 농담’에도 아서는 웃지 않는다. 권력관계의 일시적 역전을 꾀하는 풍자적 웃음 이상으로, 웃음의 무능력이 불온할 수 있음을 영화 <조커>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무능력은 반능력이 되고 끝내 반권력이 된다.
영화의 배경인 1981년 고담은 명백히 같은 시기 뉴욕을 가리킨다. 그 시절 뉴욕 또한 길가에 쥐가 들끓고 시장 후보가 테러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뉴욕을 먹여 살리던 의류산업이 몰락하며 일자리가 증발했고, 뉴욕시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1975년 말 결국 뉴욕시는 파산 직전까지 몰려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된다. 유명한 1975년 뉴욕시 재정 위기다.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보수의 전성기가 막 열리던 때이고 금융규제 완화와 극심한 빈부격차의 기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조커라는 존재, 그리고 그 무능력은 이러한 지급불능의 시대, 노동자가 일시에 잉여가 된 시대의 은유다. 복지센터 상담사인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 아서가 결국 같은 계급적 이해관계로 묶여 있다는 점, 그리고 수많은 아서들이 갑자기 부자를 공격하고 도시를 불태운다는 점에서 그것은 ‘좌익소아병적 판타지’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동시에 그것은 민주당의 위선에 절망해 트럼프를 지지한, ‘흑화’한 노동계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언젠가 푸코가 말했듯, “들고일어나는 사람들은 설명될 수 없다”. 봉기(revolt)에 그치든 혁명(revolution)으로 전화하든, 그것을 기획하고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영화 <조커>가 보여주는 풍경은 어쩌면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