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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학벌 사회에서 ‘주체적 개인’은 없다

등록 2019-09-24 17:33수정 2019-09-25 09:32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2001년)를 보면 한가지 재미있는 주장이 있다. 6·25는 국제전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뜻하지 않게 ‘신분 해방’에 기여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비록 형식적으로는 신분질서가 해체됐지만 조선인의 8할이 사는 농촌에서는 여전히 백정 등 천민 출신이 차별을 받고 노비 출신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평생 반말을 들어야 했다. 반상(班常) 차별도 많은 곳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엄존했다. 그런데 전쟁이 초래한 대규모 인구 이동의 혼란 속에서 노비 출신과 양반 출신이 뒤섞이고 전쟁 이후에 인구가 급속히 불어난 도심에서는 누가 양반, 상민, 천민의 후손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해서 수백년 동안 존재해온 신분 차별의 패턴이 불과 몇년 사이에 없어졌다는 것이 커밍스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평등화의 위대한 기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난리를 거치지 않아 1945년 이후에도 계속 부락민 차별 문제에 시달려온 일본과 대조하기도 한다.

나도 수업하면서 커밍스의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공감하면서도 한가지 덧붙일 것이 있어 보인다. 신분 차별은 없어졌다기보다는 패턴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의 양천, 반상 차별을 대신해서 학벌 사회의 틀이 공고해졌다. 양반이 세습 신분인 반면 학벌은 개인이 획득하는 신분이라는 반론이 제기될지 모르지만, 속칭 ‘스카이’(SKY) 학벌이 점점 ‘세습’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인 만큼 스카이 학벌 소유자인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아예 미국의 사립 초·중·고등학교, 명문대에 일찌감치 유학 보내는 등 국내의 학벌주의가 ‘국제적’ 면모까지 띠게 된다. 나아가서 학벌은 단순히 ‘신분’의 범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하나의 사이비 종교가 됐다. 인생의 궤도뿐만 아니라 각자의 내면까지도 지배하는 것이다.

10여년 전의 일이다. 한인 교민이 많이 사는 한 외국 도시에 갔을 때 거기에서 현지 한인 언론인 한분을 만나게 됐다. 인터뷰 자리는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로 이어지고, 헤어질 무렵이 되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인사처럼 이런 말을 건넸다. “다시 오실 때 미리 말씀해주세요. 여기에 사는 서울대, 연대, 고대 동문들과 함께해서 강의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나에게 사회 비판적 내용의 강의를 요청한 만큼 아마도 스스로를 ‘진보’라고 정의하시는 언론인이었을 터인데, ‘서울대, 연대, 고대 동문’과 ‘나머지’ 교민들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은 그에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학벌주의에 ‘좌’와 ‘우’가 따로 있는가? 자녀의 학벌 세습을 위한 조건이 요구될 때 그 고등학생 자녀를 학술 논문 제1저자로 만드는 것은, ‘진보적’ 학자도 보수 야당의 대표도 똑같이 하는 행동이다.

학벌은 1차적으로 차별의 구도다. 이 차별의 철저함은 정말이지 전통 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다. 예컨대 몇년 전 연세대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아래의 내용이 <한겨레21>에 연세대 학생들이 기고한 글에 인용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연세대학교 입시 결과별 골품 비교한다. 성골=정세(정시 합격생)·수세(수시 합격생)·정재세(재수 정시 합격생), 진골=정삼세(삼수 정시 합격생)·정장세(장수 정시 합격생)·수재세(재수 수시 합격생), 6두품=교세(교환학생으로 온 외국인 학생)·송세(연세대 국제캠퍼스생)·특세(특별 전형), 5두품=편세(편입생), 군세(군인 전형), 농세(농어촌 전형), 민세(민주화 유공자 자녀 특별 전형)…” 등의 글에는 신촌캠퍼스 학생들이 원주캠퍼스 학생들을 차별하고, 같은 신촌캠퍼스 안에서도 입시 점수를 놓고 ‘지체’ 높은 학과의 학생들이 타과 학생들을 차별하는 현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니 스카이 홍패(?)를 쥐고 있는 현대판 사대부(?)들이 지방대 출신 등을 ‘상민’ 취급하여 차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스카이 안에서도 전문 연구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다기한, 조선 시대의 서얼 내지 북인, 남인 차별을 연상케 하는 세부적인 차별 구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근대화’를 상징하는, 근대적인 보편적 이성을 대표해야 할 ‘지성의 성전’들은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학벌주의가 사회화 과정에서 개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것이 문제의 뿌리다. 명문대 서열은 대학 졸업 이후의 개인 인생의 궤도도 결정짓지만, 입학 전 삶·학습의 궤도도 좌우하고, 나아가서 개인 내면 형성에서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19살 이전 삶·학습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선생님과 교과서가 지시한 대로 특정 내용을 암기해서 암기 경쟁으로 특정 집단에의 소속을 따내는 일이라면, 자율적·독립적·주체적 개인 내면의 형성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율적 개인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다 스스로 회의해보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인데, 암기 경쟁을 위해서 10여년 동안 관리되는 젊은이가 그런 자율성이나 주체성을 획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율적 자아가 형성되지 않는 대신에 일찍부터 타율성의 일종인 서열 의식이 머리를 지배하게 된다. 삶·학습의 유일한 목표가 서열이 높은 집단에 합류하는 것이라면, 모든 종류의 서열이 쉽게 합리화된다. 학벌 사회에서 자라는 아이는 아파트 평수가 작은 친구나 학교 성적이 부진한 친구, 나아가서 다문화가정 출신의 친구를 무시하기가 매우 쉽다. 그들에 대한 차별이란 그저 당연시되는 서열의 재확인일 뿐이다. 나아가서 양성평등 정책이 지금까지의 남녀 차별의 서열적 구도를 위협할 것 같으면, 학벌 사회에서 키워진 남성들은 매우 쉽게 ‘여혐’의 유혹에 빠진다. 남성보다 ‘감히 더 잘나가는’ 것 같은 여성들은 그들에게 신성한 서열에 대한 도전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학벌 사회의 질서는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면서 이 사회를 각종 차별, 배제, 혐오의 도가니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한다. 학벌 사회가 존재하는 이상 이 나라에서 주체성이 있는 개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수세기 동안 굳어진 반상, 양천의 차별 구도가 6·25와 이농·도시화 과정이라는 외부적 쇼크 속에서만 해체될 수 있었듯이, 학벌 사회도 어떤 외부적 쇼크 없이는, 스스로 해체되지 않는다. 학벌 사회를 해체할 수 있는 외부 충격이란 바로 역차별 정책이다. 적어도 공직 사회나 공공기업, 각급 학교에서는 스카이 출신 채용의 상한제 같은 게 필요하다. 아무리 암기를 잘해서 스카이에 들어가도 판사, 검사, 교수가 될 가능성이 속칭 ‘지잡대’ 출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개개인이 일찍부터 알게 되면 학벌주의에 중독될 확률이 크게 낮아질 것이다. 학벌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라다운 나라’도 개인다운 개인도 절대 없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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