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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서울대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

등록 2019-08-27 17:47수정 2019-08-28 15:20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자녀의 입학 관련 의혹으로 정국이 시끄럽다. ‘명문대’ 입학 그 자체야 법률적 의미에서 ‘불법’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젠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그 입학 준비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 귀족과 현대판 ‘평민’ 사이의 명백한 격차다. 입학에 결정적 역할을 했든 안 했든 위험한 일을 하다가 불시에 죽음을 맞이한 김용균과 같이 한국 경제를 실질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노동자, 영세민의 자녀는, 아무리 재능이 좋아도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학술논문의 제1저자가 되는 경력을 쌓는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편법이 작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회학에서 흔히 말하는 부모의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이 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고소득자·고학력자 자녀 아니면 정보의 한계 때문에라도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대학 실험실 인턴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같은 나라의 시민이지만, 중상층 이상의 자녀가 밟는 인생의 궤도와 현대판 ‘평민’ 자녀가 통과해야 할 여정이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것만큼 대다수의 한국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도 없다.

구미권에서는 지금 사회적 불만, 나아가서 급진화의 중심에 신자유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된 2008년 이후에 사회에 진출하는 ‘밀레니얼’들이 서 있다. 그들은 근현대 역사상 부모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살아야 할 최초의 ‘박탈당한 세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육체노동자들의 평균 실질임금이야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고학력 피고용자들의 실질임금은 2008년 이전까지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질임금의 인상이 벽에 부딪친 상황에서 부동산 투기에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잉여 자금으로 인해 주거비용만 계속해서 오를 뿐이다. 거기에다가 대학교육 비용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나 이미 학자금 융자로 인해 채무자가 된 채로 졸업을 해야 하는 밀레니얼들은 주택 구매 융자(모기지론)까지 받아 상환할 능력이 대개는 결여되어 있다. 밀레니얼들의 궁핍이 급진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국의 밀레니얼이라고 할 10대 후반과 20대들은 정치적으로는 평균보다 약간 ‘왼쪽’에 서 있긴 하다. 지난 대선 때에 20대 유권자들의 12.7%나 주요 후보 중에서 가장 좌파적이라고 할 심상정 후보에게 투표했는데, 이는 격랑의 80년대를 겪은 50대들의 투표율(4.5%)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한데 구미권과 비교하자면 한국의 밀레니얼들은 여전히 ‘온건’하고 비정치적이다. 심상정은 미국의 버니 샌더스나 영국의 제러미 코빈처럼 비교적 급진성이 높은 ‘민주적 사회주의’ 담론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샌더스나 코빈처럼 상당수 밀레니얼들의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정치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에는 한국의 밀레니얼들은 살인적 학습 노동과 생업으로 너무 바쁘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저항에 나선다기보다는 ‘3포세대’ ‘5포세대’와 같은 자조 섞인 자칭들을 통해 그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구미권 청년들보다 덜 급진적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생존 메커니즘으로서의 ‘가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는 이르면 성년이 되는 18살부터, 아니면 대학 입학 시점부터는 청년이 부모와 분가하면서 더 이상 부모세대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는 그 반대로 자녀에게 직장과 아파트가 생길 때까지 그 자녀는 부모에게는 ‘챙겨야 할 아이’다. ‘가정’의 존재는 한국 밀레니얼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그 급진화를 더디게 만드는 동시에 부모 세대에게 자녀의 입학, 취업 등 진로 문제에 매우 뜨거운 관심을 갖게끔 만든다. 이 뜨거운 관심은, ‘조국 딸 의혹’에서 드러난 ‘특수 계층 자녀’의 매우 ‘특수한’(?) 사회 진입 궤도에 대한 심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사실 비교가 가능한 대부분의 산업화된 국가와 굳이 비교하자면, 기성세대 한국인의 삶이란 고생 그 자체다. 한국인의 삶 전체가 보통 ‘회사’에 의해서 철저하게 식민화되어 있으며, 거기에다가 외환위기 이후로는 그때까지 유일한 사회 보장 장치였던 ‘회사’도 언제 잘릴지 모를 불안한 곳으로 전락해 만성적 불안이야말로 삶을 관통하는 코드가 되었다. 외환위기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같은 제조업 대국인 독일·일본 등에 비해 훨씬 덜 잤으며, 지금도 일에 쫓겨 잠잘 시간을 갖지 못하는 풍토는 여전하다. 재작년 한국갤럽의 수면 관련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24분인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2시간이나 짧은 것이었다. 잠잘 시간도 못 갖지만, 휴가도 그다지 즐기지 못한다. 한국인의 평균 휴가 일수는 8일로, 산업화된 세계에서 ‘최저’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대부분의 직장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해야 생존하고 진급할 수 있었다는데, 이제 고생을 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세상이다. 공무원(평균 근속기간은 약 15년)이나 대기업(평균 근속기간은 약 10년) 종사자처럼 한 직장에 오래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직장인 사회에서 2할도 안 되고, 직장인의 평균 근속 연수는 불과 4.5년, 오이시디 평균의 절반이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고 잠도 덜 자고 휴식도 거의 취하지 못하는 한국인 기성세대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인가? 맞다. “그나마 내 아이라도 대학을 잘 나와서 이런 고생을 면할 수 있도록 내가 좀 고생해야지”와 같은 생각이다. 문제는, 조국 서울대 교수 딸의 사회 진입 궤도를 최근 며칠간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위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상사의 폭언을 들어가면서 직장에서 과로사한다 해도 그들의 자녀가 고등학교 시절에 학술논문의 제1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그들의 좌절감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중도 우파의 문재인이 아닌 온건 사민주의자 심상정이 대통령이 되어도 한국 사회의 엄청난 재산 격차 등을 5년 동안 큰 폭으로 감소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부모세대의 재산과 사회 네트워크, 그리고 문화 자본이 차세대의 ‘명문대 학력’과 사실상의 신분 세습으로 이어지게 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인 ‘명문대 학벌’은 조금이라도 타파할 수 있지 않겠는가? 법적으로 사유재산인 고려대나 연세대 등 명문 사립대는 몰라도, 적어도 국립대인 서울대와 여타의 국립대학들을 평준화해 통합네트워크로 운영하는 것은 현존의 법률 체계상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학력을 부모의 힘으로 얻는 ‘2세 사회 귀족’들이 부모의 사회적 지분을 그대로 세습하는 광경을,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다수의 한국인들이 계속 봐야 하는 한, 이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사회적 신뢰 구축도 불가능할 것이다. 자녀의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도 박탈당한 현대판 평민들의 분노, 좌절, 절망 속에서 무슨 ‘진보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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