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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쉿! 알아도 모른 척 / 신다은

등록 2019-07-30 18:14수정 2019-07-30 22:41

신다은
산업팀 기자

기사 한 꼭지를 쓰는 데 꼬박 2주일이 걸렸다. 200자 원고지 11장짜리는 보통 하루 이틀이면 마무리된다. 취재 대상이 많이 확보돼 있었다면, 취재원들이 평소처럼 전화를 받았다면, 전문가들이 거리낌 없이 조언해줬다면 말이다. 이번엔 달랐다. 반도체업계 불공정거래 관행을 취재하는데 단락마다 벽에 부딪혔다. 업계는 물론 언론도 학계도 대기업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우선 취재원과 접촉이 차단됐다.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은 아예 기자의 전화를 안 받거나 받아도 “할 얘기가 없다”며 끊었다. 각종 반도체 관련 협회를 통해 연락을 취해도 “업체들이 신원 유출을 꺼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질문조차 받지 않았다.

대학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업계 실태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던 이들도 ‘기사에 실어도 되겠냐’는 질문엔 말끝을 흐렸다. ‘대기업이 협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여섯명 교수를 30분씩 인터뷰해야 했다. 나중엔 거절당하지 않으려고 수식어를 붙였다. ‘괜찮으시다면’, ‘부담스럽지 않으신 선에서’, ‘말씀을 기사에 녹여도’ 되겠냐고 말이다. 결국 날카로운 비판은 다 빠지고 하나 마나 한 말만 기사에 걸쳤다.

대기업을 두둔하는 논리와도 부딪혔다. 어떤 대기업 고위 임원은 “대기업이 복지기관도 아니고 기술력 떨어지는 중소기업을 구제해 줘야 하냐”며 어이없어했다. 전형적인 ‘대기업 발목 잡기’ 주장이었다. “신규 거래를 억지로 늘리자는 게 아니라 하던 거래라도 단가 잘 쳐 주고 국외 진출 막지 말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더니 “그런 일이 있냐”고 했다. 마치 불공정거래 관행이 있다는 것조차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경험한 뒤 마음을 돌린 취재원도 있었다.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는 이달 초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분석’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비용 절감에만 신경 쓰고 국내 중소기업을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데에는 인색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다수 기사는 ‘환경규제 때문에 국산화 못 했다’는 제목으로 출고됐다. 연구회가 곧바로 ‘지엽적 내용을 오독하고 침소봉대했다’며 항의 자료를 냈지만 이를 다시 반영한 언론은 드물었다. 연구회는 그다음부터 언론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참고자료를 찾기도 마땅치 않았다. 검색만 하면 대기업이 뿌린 각종 보도자료와 미담이 수십편씩 쏟아졌다. 10페이지쯤 넘긴 뒤에야 반도체업계 불공정거래 관행을 다룬 기획기사들이 나왔다. 너무 희귀해서 일일이 스크랩을 해야 할 정도였다. 알 만한 이들에게 전화해 의견을 구하는 데 며칠씩 걸렸다.

기사를 다 쓰고도 욕설이 난무하는 포털사이트 댓글을 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네이버와 다음을 가리지 않았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발언 보도와 ‘공정경제 포기하지 말자’는 해설기사에는 ‘기자가 매국노’라는 살벌한 댓글이 달렸다. 대기업의 성장이 곧 국익이라 믿는 누리꾼들에게 현장의 이면을 들이밀었다가는 기자만 뭇매를 맞을 것 같았다.

처음엔 취재원들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공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입장을 듣기 위해 협력사 거래 현황을 질의했을 때 삼성전자는 곧바로 ‘어떤 사례인지’ 좁혀달라고 요구했다. 어떤 사례인지 이야기하는 순간 취재원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체 뼈대만이라도 확인해 달라고 하자 “그럼 소재인지 장비인지라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취재기자에게 “제보가 맞느냐”며 여러 차례 되물었다. “내부 확인을 해야 해서 그렇다”고 했다. 2주 동안 숱하게 취재원들에게 들었던 말을 써먹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직접 알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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