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지금 대전환기에 살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장기 저성장 추세가 뚜렷하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지구촌의 성장 엔진 구실을 해온 중국 등 큰 개도국들도 앞날이 불확실하다.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모든 나라의 스트레스가 커진다. 잦아지는 갈등과 분쟁 속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정도다.
그럴수록 우리가 사는 자리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중요하며 어떻게 내실을 다져나갈지 따져보고,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서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과제는 역시 정의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분열과 대립을 부르고 구성원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을 만난다.
왕이 말한다. “선생(맹자)이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또한 내 나라에 이익이 될 일이 있겠지요?”
맹자가 대답한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이익 말고도) 또한 인의(仁義)가 있으니 그것만을 말씀하십시오.”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라고 하시면, (그 아래) 대부(귀족)들은 ‘어떻게 내 집에 이익이 될까’라고 하고, 일반 백성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익이 될까’라고 합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만약 의를 나중으로 하고 이익을 우선으로 하면 (아래는 위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맹자>의 맨 앞쪽에 있는 ‘양혜왕’편의 한 대목이다. 정의(의)는 동아시아의 문화 전통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맹자는 인(사랑)을 가장 우위에 둔 공자를 계승하면서 의를 인과 대등한 수준으로 높인다. 이후 ‘인의’ 또는 ‘인의예지’는 유교의 최고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정의에 대한 인류의 사고는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공리주의 영역이다. 여기서 정의의 실현은 목표에 얼마나 다가가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그래서 목표 성취에 도움이 되는 원칙·규칙·제도를 잘 정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공리주의 영역이라고 하는 이유는 역사상 나타난 다양한 목표 가운데 공리주의가 내세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 목표는 주기적인 선거와 다수결을 기본 원리로 하는 근대 민주정치의 정신과 맥이 닿는다.
이와 달리 의무론적 영역은 특정한 목표 달성과는 별개로 옳은 것이 존재하며, 이를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절대 정의로울 수 없다고 강조했고, 이마누엘 칸트는 ‘너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했다. 의무론적 영역의 많은 부분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기본권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곧 모든 구성원이 자유권·평등권·사회권·참정권·행복추구권 등을 갖지 못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마지막 영역은 상호성에 뿌리를 둔 정의다. 상호성은 사람들 사이 관계에서 생기는 정의감을 중시한다. 고대사회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원칙이 이에 해당한다. 현대 정의론을 정립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현대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공평하게 작용하는 사회적 협력 시스템’으로 보고, ‘공정으로서 정의’를 주장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상대적으로 대등한 사람들이 공정에 대해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균형 있는 상호성’이다. 대등한 사람끼리는 서로에 대한 의무도 같으며, 이것이 바로 공정이자 정의다.(<정의의 역사>)
현대사회에는 이 세 가지 형태의 정의가 섞여 있다. 셋이 유기적으로 잘 결합해 실행에 옮겨질수록 건강하고 활력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 정의와 자유는 어떻게 연관될까?
자유는 민주사회의 기본 전제이지만, 사회적으로 정의는 자유를 규율한다. 자유의 구체적 형태는 세 가지 정의관의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의 기본권은 보장돼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원칙적으로 현대사회의 모든 시민은 균형 있는 상호성을 가지며, 동일한 수준의 자유와 의무가 적용된다. 삶의 조건이 열악하거나 보통의 시민에 비해 대등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자유에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기본권인 자유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사회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사회적 협력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라면, 삶의 조건이 나은 이들이 여기에 필요한 자원을 능력에 따라 부담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들어맞는다. 물론 그 부담이 일정한 선을 넘어설 경우 자유의 제약이라는 반발이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 선은 각 사회의 고유한 규범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 외의 영역에서는 공리주의 원칙이 작동한다. 최대 행복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든 자유롭다. 거꾸로 말해, 어떤 행위든 할 수 있지만 본인뿐만 아니라 다수에게 행복을 주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해야 한다.
■ 문재인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포용을 강조한다.
성장의 혜택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고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포용적 성장’과 최소주의 사회복지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전 생애에 걸쳐 누리는 ‘포용적 복지 체제’를 추구한다. 나아가 국가 비전으로 ‘혁신적 포용국가’를 내세운다.
포용은 정의 실현의 전제조건이자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개념이다. 혁신적 포용국가 역시 사회정의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국민 누구나 성별·지역·계층·연령에 상관없이 차별이나 배제 받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으며 함께 잘 살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혁신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를 위한 역량과 체제를 갖춘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접근은 오랫동안 생산과 성장 쪽에 치우쳤던 정책의 중심을 국민의 행복과 사회정의 쪽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타당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혁신적 포용국가를 만들려면, 각 분야의 각론을 비롯한 정교한 로드맵뿐만 아니라 지속해서 정치·사회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신뢰 구축이 필수다. 국민 다수가 사회적 협력 시스템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폭넓게 재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 일찍이 공자가 말했듯이 백성의 가난보다 더 큰 문제는 고르지 못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정치는 정의롭고 (백성이) 고르게 살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꼭 유교 전통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람은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다. 작은 일이라도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면 크게 분노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몸을 던진다.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한 근원적인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정의감에 걸맞은 사회적 협력 체제를 만들어 발전과 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버젓한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이어서 더 그렇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